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다채로운 차원들로 이루어집니다. 육체는 실질적인 도움의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실제 배가 고픈데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질문은 아무 짝에 소용이 없습니다. 국밥이라도 한그릇 사다 주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초적인 욕구의 충족을 벗어나서 인간은 다른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상 편지를 통해서 감동을 느끼는 것을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아무것도 받는 게 없지만 그런 영상편지나 손편지와 같은 것을 통해서 작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그러한 요소들이 감성을 자극해서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성도 '가르침'을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는 지식들을 전달해 줄 수 있고 그러면 무지에 잠겨 있던 이들이 배우게 됩니다. 이성을 통한 훌륭한 도움의 수단입니다.
헌데 '영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도움을 주고 받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사랑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수단으로 오고 갑니다. 따스한 손길을 통해서도 사랑이 오갈 수 있고 사랑을 가득 담은 물건들이나 편지를 통해서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헌데 이 영혼의 도움 가운데에는 특별히 '보이지 않는 도움'이 존재합니다.
햇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그 햇빛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빛은 여전히 존재하고 나를 감싸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눈을 감고 뜨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는 보지 않고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은총의 손길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기도는 '보이지 않는 힘'을 바탕으로 그 기도의 대상에게 전해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도, 기도를 받는 사람도 흔히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그 대상자에게 어떤 힘을 미칠 수 있을까 의심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눈에 보이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즉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전능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는 실제적인 행위입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밥을 주기 전에도 아이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꾸준하고 성실하기에 결국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게 됩니다. 반면 음식을 하다가도 갑자기 짜증이 나고 아이가 미워 보이면 하던 밥도 쓰레기통에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사로잡혀 있는 잡다한 욕구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빛을 아무리 쬐어주더라도 그것을 받는 사람이 눈을 닫아버리고 '나는 빛을 받은 적이 없소' 하고 우기기 시작하면 그에게는 빛이 가지 않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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