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예수님의 이 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지껏 신앙생활을 '일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헌데 예수님은 마치 일치를 파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말마디 그 자체에 집착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된 의미의 일치, 진정한 의미의 일치라는 것은 그저 어중이 떠중이들을 끌어 모아 둔다고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합지졸'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이들을 끌어모아 군대를 만든다고 해서 그 군대가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여지지는 않습니다. 뚜렷한 같은 목적이 있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일 때에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일치된 동작으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분열'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의 간단한 질문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시 '악'이 자행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우리 중의 그 누구도 하느님의 나라에서까지 악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상 생활을 하는 동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이곳에서 정화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분리'와 '분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품고 살아가면서 양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따르고 세상의 악도 수용하는 식의 삶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존재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즉, 우리가 악에서 해방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내면의 분명한 선택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함께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즉 자녀가 성인이 된다고 부모가 성인이 되라는 법은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 식구 중에 누군가가 '사제'라거나 '수도자'라는 것을 내세우려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제직에 충실하려는 그 개인의 노력이 친적이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자동으로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성인의 아무리 가까이에 머물러도 악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쥐고 있으면서 슬쩍슬쩍 돈을 훔치기도 하면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가장 가까이 머물러 있었고 기회만 되면 그분을 넘겨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인의 주위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저 같은 시간과 공간을 나누었다고 한 사람의 성덕이 자동으로 타인에게 전염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내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나날이 구체화 해 나가야 합니다. 다이어트 계획을 짰다고 해서 살이 자동으로 빠지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목표를 향해서 정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선을 선택해야 하고 그 선이 내 안에 자리잡고 구체화 되도록 나날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습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선을 향한 의지와 악을 향한 의지의 분명한 구별을 하고 그 둘을 힘있게 갈라놓아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열매를 맺고 가라지는 심판 때에 그 모습이 드러나도록 준비하십니다.
댓글
아멘.👏 💞
고맙습니다.
마진우 요셉 신부님
분열의 말씀 뒤에 숨겨진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이제는
그 알고 있었던 것에 확신이 섭니다.
늘 건강하시고 거룩한 사제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