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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하다




반대하다, 반항하다, 반기를 들다 모두 비슷한 표현입니다. 누군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역행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1독서에서는 스테파노와 그에 대항하는 이들이 등장을 합니다.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라고 표현됩니다. 백성은 평범한 사람을 말하고 원로는 명예로운 이들을 말하며 율법 학자들은 학적 권위를 지닌 이들을 말합니다. 이 세 계층이 하나도 예외 없이 스테파노에게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나 강하고 광범위한 반대 속에서 스테파노는 용기를 잃을 법도 한데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해야 하는 말을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참지 못해 스테파노에게 물리적 제재를 가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합니다. 나아가 그렇게 하고 있는 이들의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그 시작점에 내적인 반대가 선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외적인 형태의 악은 이미 그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진리에 대한 반항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세상은 복잡한 듯이 보이지만 의외로 단순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진리를 쫓는 사람들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로 나뉘어집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 그렇지 않은 이들의 부류는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욕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복음에서도 유사한 대립구도가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진정한 빵을 주시는 분'을 소개하고자 하고 군중은 '빵'을 섬깁니다. 그래서 둘은 '빵'이라는 유사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주고 받는 셈입니다. 군중은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세속의 빵을 예수님께 달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를 구원에 이끌어 줄 하늘의 빵을 받아 먹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눈을 뜨고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면 우리가 하는 일상의 수많은 일들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 앞에 반대를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바라보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행위로 포장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댓글

준 요셉님의 메시지…
듣고 있으면 힘든 말이 우리에겐 존재합니다.
거친 욕이나 자신에 대한 나쁜 말 보다, 올바른 말.. 즉 '진리'가 담긴 말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성장과 정화에 도움이 되어주는 말은 당장에 쓴소리 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삶이 바뀌는 큰 힘으로 발휘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달콤하게 다가오는 말들의 대부분은 지금 당장 위로와 안락을 주는듯 하지만, 결국 더 짙은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 말씀과 사탄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옵니다.
과연, 나는 어느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있을까요?
과연, 나는 어느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을까요?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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