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야 익숙해져 그렇지만 만일 한국의 누군가를 갑자기 이리로 데려와서 제가 하고 있는 삶의 범위에 동참시키려 한다면 그에게는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을 것이며 대화도 힘들고 여러가지 문화적 차이로 불편하겠지요. 더군다나 제가 종종 올리곤 하는 식사 초대에 직접 데리고 가서 함께 음식을 나누게 하면 자신이 상상하던 사진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실제의 상황에 굉장히 힘들어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보지만 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종종 부러워하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심지어는 제가 사는 환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인간이 온전히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여러가지 부정적인 모습과 불편이 싫어 세상에 나간다지만 그곳이라고 완전히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순히 하나의 지표를 놓고 보면 어느 나라인가 분명 나은 곳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한국은 치안 수준이 굉장히 높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또다른 지표를 놓고 보면 한국은 그야말로 헬조선이 되는 것이지요.
중요한 건 우리의 외적 환경을 뒤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투덜대는 사람은 투덜댈 것이고, 어딜 가든 행복한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아마 지금의 시대는 이제 사람들이 내적인 충만을 꿈꾸고 영성을 찾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향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충만하게 해 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보물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내적 충만함을 선물하기 때문이지요. 바로 영원을 바라보게 하고 모든 것들의 참된 가치를 바라보게 도와줍니다. 지극히 작고 소박한 것으로도 감사하고 기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연 그 보물을 누가 지니고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분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법’, ‘처세술’, ‘인간적 위인’, 심지어는 현대적 ‘주술’에게까지 조언을 구하지 결코 예수님, 즉 하느님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습니다. 낡았고 구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대로 개봉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치를 올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근처도 가지 못한 셈이지요.
세상 안에는 언제나 두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참된 가르침을 뒤쫓아 나아가는 사람과 예전의 틀에서 머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외적 지표는 오히려 정반대로 비추어 질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참된 가르침을 뒤쫓아 갈수록 세상의 호화스러움에서 점점 멀어지고 반대로 예전의 틀에 머무는 사람은 어떻게든 모으고 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