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감당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존재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들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집세를 내는 것이나 차를 할부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은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 아이는 일단 세상의 경험을 쌓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기초적인 지식부터 쌓아 나가야 합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다음 단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에게 그 단계를 설명하면 그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제 겨우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이런 저런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이에게 대뜸 십자가를 가르치기 시작하면 그는 전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우선적으로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당의 분위기를 전해주고, 미사포를 쓰는 모습이 멋져 보이는 것에 매력을 느끼게 해주고 이런 저런 소소하고 단순한 신앙 진리를 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려던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요? 아마 가능하다면 모든 천상의 진리를 깨우쳐 주시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영적’이라고만 표현되는 전혀 새로운 그 세상을 알려주시고 싶어하셨겠지요. 훗날 그 현실이 다가오면 지금의 세상이야말로 비현실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즉 아직도 지상의 현실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에게 천상의 사정이라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 앞에 펼쳐진 대학 전공서적과도 같은 것이지요.
본당에서 또 일상에서 때로는 많은 것을 전하고 싶지만 이야기를 듣는 대상자의 수용 능력이 충분치 않아서 적당히 절제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막 세례 교리를 들으러 온 부모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현실에 맞는 가르침이면 충분합니다. 그들에게 영적 사정을 가르친다고 그들이 이해할 리가 만무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정은 때가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지요. 하지만 섣불리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덤벼드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영적 탐욕일 뿐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이끄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잔뜩 교만에 부푼 자가 되게 만드는 수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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