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돈으로 거래를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돈 위에 새겨진 문양과 글자에 따라서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상호간의 신뢰가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자기도 모르는 채로 위조 지폐를 들고 물건을 사려고 하는데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돈이 위조지폐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면 그때에는 상호간의 신뢰가 달라지는 셈이고 거래는 성사되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에 기반한 사회 위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기본 ‘상식’이라는 믿음 위에서 살아가지요.
그 가운데 보다 본격적인 믿음의 행위가 도전처럼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거룩한 것들에 대한 믿음이지요. 하느님과 그분에 관련된 것을 믿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도전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그 믿음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믿는 것,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은 보다 낮은 차원의 것들입니다. 간단히 설명을 하면,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처음부터 하느님 때문인 경우는 굉장히 드뭅니다. 사람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나 교회의 위치, 그리고 그 가운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참된 믿음에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곧잘 교회 멤버 중의 누군가로 인해서 기분이 상하고 감정이 상해서 교회를 나오지 않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때문에 교회에 나온 이들이 아니라 다른 부수적인 요소들 때문에 교회에 나왔고 그러한 것들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기에 우리가 믿음을 형성해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다른 한편으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외모와 말투, 그의 억양과 지식 수준을 알 수는 있지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에 관련된 것들도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화려함으로 우리를 속이려 하고 우리를 자기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요. 그러한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눈속임에 넘어가게 되고 그 속에 깃든 실제적인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과 선,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분별하는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스러워 보이는 외모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속에 썩은 것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과연 우리는 참다운 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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