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제가 머무는 산타 크루즈 대교구에는 성소 부족이 큰 고민거리입니다. 비단 저희 교구 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제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동양인 사제까지 와서 선교를 하겠습니까. 이곳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사제성소를 꿈꾸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소 대상자 본인들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주 이른 시절부터 이성교제를 체험하고 성경험까지 있는 와중에 독신제를 바탕으로 하는 사제 성소나 수도 성소가 젊은이들의 흥미를 끌 리가 없습니다. 아예 순진하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혼자 살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은 정말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한 편으로 성소 대상자 가정의 문제도 있습니다. 집안에서는 자신의 자녀가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집의 일꾼이 하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의 생각 안에는 자신의 자녀들은 일종의 미래를 향한 보험이고 투자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노인 연령층에 대한 복지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녀들은 그야말로 엄청난 보험인 셈이니까요. 그래서 가끔씩 일어나는 성소에 대한 바램도 부모의 선에서 적극적으로 차단 되곤 합니다.
나아가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제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올바른 사제상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술을 진탕 마시는 존재로, 결혼만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을 마음껏 하는 비도덕적이고 위선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마주하는 사제에게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지지부진한 강론과 지루하게 반복 되기만 하는 전례, 무언가 영적인 양분을 얻고 기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오는 미사는 결국 성소의 싹을 그 씨앗부터 말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외국에서 오는 사제들은 정반대로 ‘사제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얼굴이 희고 이국적인 용모에 외국의 우수한 문화 수준에서 오는 선교사 사제들은 현지인들이 성소를 갖지 못하게 가로막는 또 하나의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볼리비아 교회의 성소의 문제는 복잡다단합니다. 어느 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의 세례자 수는 인구의 80퍼센트에 육박하지만 실제적인 성소자의 수는 지극히 초라할 뿐입니다. 사제 모임에 가 보면, 현지인 신부는 고작 1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미국과 유럽의 선교 사제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니 방인 사제들이 나오기가 정말 힘든 환경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근본부터 살펴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신앙의 부재’입니다. 사제가 되는 것은 이런 저런 조건을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로 향한 헌신의 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말 뜨거운 신앙이 있다면 그 신앙을 바탕으로 타인들을 신앙으로 초대하고(예언직), 하느님의 거룩한 일을 집전하며(사제직),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려는(왕직) 마음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니게 됩니다. 이런 강렬한 바람이 젊은 시절에 와 닿게 되면 그것을 향해 자신을 헌신하는 방법을 찾게 되고 결국 사제직이나 수도직에로 자신을 내어바치게 되는 것이지요볼
한국은 과연 어떨까요? 이미 한국도 사제가 없다고 볼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직 사제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사제 수가 절대적으로 너무나도 부족해서 버려지는 본당이 있지는 않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초창기에는 보좌 신부를 2년만 해도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길게는 심지어 10년을 보좌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젊은 의욕있는 사제들이 반복되는 생활에 활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면 훗날에는 분명 사제의 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 분명합니다. 의욕이 없는 사제는 다른 젊은이들에게 감화를 줄 수 없으니까요.
성소의 문제는 기타 여러가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살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의 문제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신앙이 있다면 분명 그 신앙에 가장 합당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마련이고, 또 신앙이 있는 가정은 자신의 자녀들 중의 하나가 사제성소의 길이나 수도성소의 길을 간다고 할 때에 반대하기는 커녕 기꺼운 마음으로 힘과 도움이 되어 줄 것이며, 신앙이 있다면 사제들은 열과 성을 다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감화를 일으켜서 신앙의 길을 걸어 나가도록 재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양분이 충분한 곳에는 씨앗이 싹을 틔웁니다. 성소의 씨앗은 풍부한 신앙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자라납니다. 한국 교회는 이 자양분을 마련하는 데에 힘써야 합니다. 건물이 높이 올라간다고 신앙이 절로 자라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데에서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머무는 남미, 볼리비아에는 사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버려지는 본당, 버려지는 공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각 본당마다 말씀의 은혜를 기다리고, 성체성사의 은혜를 기다리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한국에서 성소를 지망하는 사제들이 단순히 자신이 머무는 나라 안에서 자리를 잡으려는 좁은 안목을 버리고 보다 넓은 세계적인 안목 아래에서 진정 하느님의 백성이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다짐을 새롭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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