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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지는 두 운명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요한 8,21)

자신이 매달려 있는 것의 더러운 실체를 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벗어나게 해 달라고 구원 요청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벗어날 생각은 커녕 도리어 그것을 사랑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지게 됩니다.

인간은 죄를 사랑합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올바로 이해하고 나면 실제로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법 규정의 어김’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판공 때마다 울며 겨자먹기로 고백하는 ‘주일 미사 미준수’ 따위의 피상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죄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내면의 방향성이 하느님을 향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 교회의 유명 신심단체 회원인 A씨를 바라봅시다. 그는 성당 일에 정말 열심입니다. 주 중의 적지 않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냅니다. 여가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신경질적이고 특히나 집에서 가족들과 올바른 친교를 이루지 못합니다. 친척들과의 관계도 거의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성당에만 와서 자신이 선호하는 신심단체의 일을 할 때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과연 그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는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상적으로 노력하고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은 소홀히 하고 대신에 거기에서 부족해지는 인간적 애정을 ‘교회 신심단체’를 바탕으로 채워 나가려는 것이지요. 교회는 그의 내면의 정서적 불안의 대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을 추구하는 장소, 즉 하느님의 뜻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하기 위해서 더 배우고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서 나아가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가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당 활동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래적인 자리, 즉 가정의 가장의 자리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려고 할까요? 그는 자신이 이미 ‘투자’를 한 성당의 직분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죄를 사랑하는’ 하나의 형태인 것입니다.

어둠의 영은 아주 교묘하게 빛의 영을 가장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정당화 합니다. 우리는 껍데기가 ‘신앙’이라는 이유로 신앙의 본질은 버려둔 채로 외적인 행위에 매달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과도 같지요.

진짜배기 신앙인들은 하루 하루 하느님에게 나아갑니다.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새로운 걸음을 내딛으면서 빛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러나 죄를 선호하는 이들은 죄 속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곳에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고 싶지 않을 뿐더러 그럴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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