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인간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 가운데에는 실제로 그렇게 종교를 사용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요. 하지만 실제 종교라는 것, 우리가 신앙하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것은 그 진실한 내면을 들여다볼 때에 결코 인간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마법사들은 모세의 기적을 흉내낼 수 있었지만 절대로 모세와 같은 범주의 일을 해내진 못했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능력이 발달하면서 현대에는 과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영혼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서 진정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나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영혼이 추구하는 것을 올바로 찾는 이는 결국 하느님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오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도 같지요. 반면 인간의 내면의 영적인 활동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아무리 외적으로 그 비슷한 흉내를 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신론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와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의 교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다들 저마다의 ‘신념’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그 자체의 ‘신념’을 형성하고 그것을 신봉하는 셈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계신 것을 증명하기도 힘들지만 계시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인간에게 영원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서 지금의 이 현실마저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지요. 즉, 신앙을 통해서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이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신앙을 왜곡하고 신앙으로 현세의 이윤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변화시키지 않은 채로 외적인 신앙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산다면 훗날 우리는 우리의 생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보고 신앙을 멀리하게 된 이들에게까지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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