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숨김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들과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내용으로 가르침을 바꾸어서 전해 준 것입니다.
이 작업을 하려면 먼저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앵무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말마디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는 사람은 같은 내용을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전해줄 수 있게 됩니다.
가끔은 사목 현장에서 제가 한 강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절대로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마음이 그 가르침에 대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 뿐이지요. 비슷한 예로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제자들이 저마다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만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두 저마다 ‘그럴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니 스승님에게 확답을 얻어야 하겠군.’하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은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너는 아니다’하고 대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늘 남기십니다. 물론 그러한 가운데 예수님을 배반하는 당사자에게는 그것만큼 분명한 뜻도 따로 없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게 선할 수 없습니다. 선한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고, 우리는 언제나 흔들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자유의지로 끊임없이 선하신 하느님을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 선하고 바로 서 있던 이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오늘 악에 잠겨 있던 이라도 내일은 회개할 수도 있는 법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선에 머물러 있는 동안 꾸준히 주변을 선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행여라도 훗날에 내가 어둠에 빠져들 때에 나에게 손이라도 내밀어 줄 사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게을리하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주의적인 구원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훗날 행여라도 일이 잘못되면 그 누구도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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