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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에 대한 고찰



오늘도 한 본당의 50년사를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주임 신부님들의 약력을 가만히 보면 보좌의 기간이 불과 2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주임’으로 한 본당을 책임지러 나갔지요.

오늘날 보좌의 기간은 길게는 10년 가까이나 됩니다. 그 수많은 기간동안 소위 ‘큰 본당’에서 주일학교와 청년회를 담당하면서 지내게 되지요. 다행히 저는 그 기간이 고작 3년 뿐이었고 바로 볼리비아에 나와서 선교지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본당에서 오랜 기간을 일하다 보면 당연히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본당들의 예상이 그렇게 넉넉한 줄 알게 되고, 모든 본당들에 그렇게 사람이 넘쳐나는 줄 알게 되며, 아이들과 청년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훗날 나와서 체험하게 되는 사목의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큰 본당이 있는만큼 영세한 본당도 있으며 사무장 월급도 제대로 챙겨주기 힘들어서 주말만 잠깐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를 써야 하는 현실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의 해결책일까요? 물론 외적인 여러가지 해결책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세자의 숫자를 늘리고 냉담자 회두를 해서 본당의 숫적인 규모를 늘리고 교세를 확장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본당의 크기를 늘리면… 하지만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내면애 있습니다. 복음화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무엇이 진정으로 신자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에 대한 성찰, 그리고 본당이 ‘사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의 변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외적인 방향으로만 기울어져 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행복한 삶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신앙이 자꾸만 외적인 것으로 대체되고 여러가지 각종 행사와 통계적 숫자로 대치되어 갈 때에 우리는 복음적인 교회에서 기업형 교회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기업형 교회에서는 ‘효율성’이 우선시되고 ‘기능성’이 대두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발붙일 여지가 없어지게 됩니다. 실력이 너무나 뛰어난 성가대에는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은 겁이 나서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교회의 근간에는 낮은 자를 살피시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신앙이 있어야 하고, 우리 이웃 형제 간의 친교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유혹에도 빠지고 죄도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팔을 벌리고 기다려주는 교회가 그들에게 필요합니다. 교회는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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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