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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병원이 어디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가능하면 그런 곳은 피하고 싶었다. 고통당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아픔을 겪고 난 뒤, 그 야심한 밤에 고통에 신음하며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래보고 난 뒤에는 비로소 그들의 아픔을 겪을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고 또 내가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또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도우러 오는 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을 직접 체험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아버지에게 간절히 비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온갖 증오와 비방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아들이 겪은 비참함 속에서 그 아들의 간청과 애원을 들으시고 부족함이 가득한 우리를 너그러이 보살피시는 것이다. 또 한 번 기회를 주시고, 또 한 번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아직 자기 스스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 자신이 지닌 것이 자신의 힘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 가지고 누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보다 더 높은 존재로 간주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신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면 된다. 그 신뢰라는 것이 세상적인 시선으로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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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그가 지닌 '사제직'이 더럽혀…

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사제의 여성과의 만남은 굉장히 신중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피치 못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하다면 여성분들은 가장 적합한 ‘여성 지도자’를 찾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덕망 있는 수녀님이나 본당의 신뢰할 만한 여성 평신도를 추천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피치 못하는 경우라면 열린 공간을 확보하고 가능한 모든 추문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면담은 거의 한 번으로 끝나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현실 속에서는 ‘바쁨’이 일상화 된 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한 두 번이 끝이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예수님을 마주한 이들에게 엄청난 영감과 색다른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고해소 이외의 환경에서 장기적인 면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케이스는 한 번의 개인 면담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고 장기적으로 한 사제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늘 이용할 수 있는 고해의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또는 본당처럼 서로 같은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 찾아온 내담자가 ‘장기면담’을 요청할 때에는 그가 사는 곳 주변에서 합당한 인물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사제는 스스로 ‘분별’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한 분별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는 고해소 외에 따로 다른 면담을 시도하는 것에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해소 밖을 벗어나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는 이를 ‘원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태초의 상태를 말하지요. 첫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