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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선인가?



'복음화'라는 말만큼 광범위하고도 힘이 없는 말이 따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듯이 이 핵심 과제야말로 우리 교회에 뿌려져야 하는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제가 본당에 가서 무엇을 느낄까요? 그것은 우리가 한 사람을 만나서 처음 그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요소입니다. 그의 외모와 옷차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챙기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들게 됩니다. 처음 가보면 이런 것도 없어 보이고 저런 것도 없어 보이고 이런 것도 불편해 보이고 저런 것도 불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작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마주치는 것은 교회의 인적 구조입니다. 이런 저런 직분이 필요할 것 같고 사람이 아쉽고 또 지금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조금은 지켜봐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한 사제가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버둥거리다 가는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 미미한 움직임이라도 정말 필요한 핵심 요소에 쏟아부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릅니다.

저는 교회의 힘의 본질은 '복음전파'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잘 전달된 본당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모여들게 되고 그리고 그 복음을 중심으로 기쁜 공동체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자신들이 필요한 외적 요소를 갖추기 위해서 힘을 모아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외적인 것부터 챙기려고 들면, 사람들이 지쳐 떨어져 나갑니다. 충분히 밥을 먹지 않고 일을 시키면 허기가 져서 하던 일도 멈추게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은 영적 양식을 충분히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내 다음 책임자부터 일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준비된 사람들과 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고 필요한 일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그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

익명님의 메시지…
신부님 말씀처럼 당장 열매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씨앗을 뿌리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는 생각에 동감합니다. 누군가의 하느님을 만나는 계기가(엄청난 전환점이)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실로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등학교때 갑자기 나타나 저에게 교회가자고 손을 내민 친구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친구의 복음의 열매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지난후에 저에게 나타났으니까요...ㅎㅎ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루터기님의 메시지…
새로오신신부님께서전반적인체제를다바꾸시고봉사자들도갈아치우셨습니다새로운일도엄청벌리셔서모두가힘들어하고반발도많았고부작용도컸습니다그러나헌신적이고열정적인신부님행보에조금씩익숙해져갔고소수신심깊은봉사자들과따르는이들도생겨났습니다시일을두고보신어떤단체에영적쇄신을위해활동을멈추게도하셔서큰문제가야기됐습니다물론그럴만한사건이터져원인이되긴했지만신부님은그단체신자들과외로운싸움을강행하셨고곤란한일도당하셨습니다그때가까이서함께하면서신부님께서무리수를두시면서도진정교회를걱정하셔서감수하신일인것을알고함께고민하고기도하며도와드린적이있습니다결국떠나실때까지좋은결과를못보셨지만복음선포에무게를두셨기에떠나가신후지금에그결과를얻어낸것이아닌가생각합니다그때어려움을감당해내신신부님을존경합니다'다우트'라는영화의주인공신부님같으신분-"바람은불고싶은대로분다"그복음이와닿은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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