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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목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지성이 조금이라도 형성된 어린아이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체는 성체가 뭔지 알아볼 만한 나이면 초등학생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복음의 구절도 살짝 혼란스러워 보일 순 있지만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목숨’이라는 것의 의미만 조금만 설명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 문장 속에서 등장하는 ‘목숨’은 2가지의 목숨을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육신의 목숨입니다. 이는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죽음과 더불어 마무리됩니다. 누구에게는 짧고 누구에게는 조금 더 길 수 있지만,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계가 있는 이 목숨을 누구나 소중히 여깁니다.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어 목이 마른데 병에 물이 얼마 없으면 아껴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 없고 점점 사라져가니 아까울 수 밖에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물을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하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펄쩍 뛸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목숨은 영혼의 목숨인데 이는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 주시는 것인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혼의 목숨은 채워짐과 비워짐이 있고 깨끗해짐과 더러워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목숨을 잃는 것은 영혼이 공허하고 더러워진 상태를 말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영혼이 충만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혼을 채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은총’을 얻어내는 법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원의 목숨을 위해서 현세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법을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죽은 믿음과 산 믿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자극을 주면 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반응을 하겠지요. 그럼 죽은 영혼과 산 영혼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육체의 경우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합니다. 그에게 영적인 자극, 구원에로의 초대가 왔을 때에 죽은 영혼은 반응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 살아있는 영혼은 반응을 하겠지요.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야고보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잠깐 이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은 영혼은 움직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죽은 영혼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입니다. 반면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도 유념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모든 활동이 믿음의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레지오를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계모임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레지오 모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구성원 사이의 친교만 열심히 다지면서 정작 성모님의 의중은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레지오라면 그것은 믿음의 실천을 하고 있는 레지오가 아니게 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엄청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고 열심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본당이 있을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 돌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건축일을 하는 사목위원이 뒷돈을 욕심내며 본당의 커다란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려고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신앙의 환경을 이용해먹고 있는 것이지 진정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열심해 보이는 외적

수치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사춘기 시절 아이들은 힙합 복장이 유행이었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늘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과거의 행실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참 멋있어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부끄러운 장면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작 당하고 있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잡아 뜯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는 것이 세상에서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저자는 이를 ‘수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당해도 수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저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수치는 하느님 앞에서 ‘불의로운 자’로 판명받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어떠한 수치스러워 보이는 취급을 받아도 그것은 수치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행여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으려고 하면서 하느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일은 이 현세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세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숨겨지는 것이 하나도 없이 우리의 영혼이 빛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