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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의 게시물 표시

루카 복음으로 살펴보는 복음 선포

1. 부르심 먼저는 주님이 부르십니다. 돈을 버는 일이면 우리가 알아서 찾아 나서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사명을 부여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사도들을 부르셨고 사도들이 다른 이들을 부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부르심은 유효하고 우리는 그 부르심의 연장선 속에 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권리와 의무 부여 주님은 일만 시키지 않습니다. 그 일을 실행할 구체적인 능력을 함께 주십니다. 땅을 파라는 이에게 삽을 쥐어 주고 요리를 하려는 이에게 칼을 주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질병을 고치는 힘입니다.  또한 가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보내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아주 명백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줍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입니다. 병원을 해도, 학교를 해도 그 근본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입니다. 또한 병자들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육체적인 질병도 함께 고쳐 주었지만 오늘날에는 '영혼의 질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만날 때에 먼저 내면의 병을 다스리셨습니다. 영혼의 질병, 즉 죄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파견된 이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 3. 복음 선포시 지침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지침은 달리 말하면 온전히 하느님에게 의탁하라는 지침이기도 합니다. 부가적으로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요소를 빼내는 것이지 모든 것을 없애고 알몸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을 때에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고 그 도움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유대 관계 속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지침의 핵심입니다. 4.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지침 우리는 흔히 착해야 한다고만...

신앙인의 발전 단계와 다양한 유형

처음에는 누구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모르는 걸 어떻게 할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조금씩 기본적인 '가치'라는 걸 배웁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좋은 건 남에게도 좋고 나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다는 걸 배웁니다. 아주 기초적인 윤리관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성이 자라면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 '정의'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법에 따라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영역인 신앙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진 기초 위에 '믿음에 근거한 질서'를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당에 왜 나와야 하는 걸까요? 세상적 가치 기준에서는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기준에서는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지고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신앙인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내던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신앙의 가치를 재면서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신앙의 가치를 내던지는 이들입니다. 보통 성당에서는 이런 이들을 '냉담자', 또는 '쉬는 교우'라고 부릅니다. 물론 냉담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의 비교에서 신앙의 영역에 몸담기보다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낫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변함 없습니다. 이들 보다는 조금 더 나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어두울 수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세속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자신의 놀이터 정도에 그칩니다. 마땅히 다른 더 즐겁고 재미난 일이 없기에 신앙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본격적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특정 영역에서만 신앙인이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 세속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

우리가 길거리에서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에 알몸을 보이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상대적인 요소입니다. 한국에서 배를 까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배를 까고 다닌다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과거에는 통통한 여성들이 부의 상징이자 자랑스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의 대상처럼 취급됩니다. 세상의 부끄러움은 세상 사람들의 유행과 변덕에 따라 이리 저리 뒤바뀌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변함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수치스러워 하는 것은 영원 안에서 수치스러운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그분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원 안에서 자랑스러운 일이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최고의 작품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외아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저마다가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이 하느님의 외아들을 달리 받아들입니다. 식당에서 성호를 긋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제가 홀인원 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가 하면, 수도자가 엄청 값비싼 음식 초대를 받았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신학교에서 한 친구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험담하고 다니는 신학생도 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부끄러움일까요? 잘 성...

그리스도의 사랑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이 말은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다가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고 악인은 언제나 그 희생양으로 동등한 악인을 고르지 않고 의인을 고릅니다. 악인도 악인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 어떠한 보복을 당할지 알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습니다. 반면 악인은 의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들의 순진성은 악인의 내면에 있는 악을 짐작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선한 이들, 타인을 잘 믿어주는 이들에게 사기를 칩니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사람도 그 폭력에 쉽게 휘둘릴만한 내면이 약한 이들을 희생물로 삼습니다. 그렇게 의로운 이들, 타인에게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하는 이들은 너무나 쉽게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의 희생양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 선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다가오는 위협에 세속적으로 대응을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으로 무기를 만들고 상대의 위협에 그에 상응하는 폭력으로 대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들처럼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히 약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진정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전부나 다름이 없었고 그 나머지는 얼마든지 빼앗겨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아멘, 아멘.

영혼의 고통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우리가 숨쉬고 있는 몸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영혼'이 존재하는데 이런 현실에 따라 '행복'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몸과 현세를 위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영혼과 영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고통이라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프고 현세가 절망적이어서 고통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도 영혼을 통해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지혜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그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은 세상에서 다른 그 누구보다도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들의 영혼은 영적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대표적인 것으로 '죄책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본 적 없고 자신만이 아는 일이지만 영혼은 끊임없이 스스로의 죄를 책망합니다. 사실 악인들이 현세의 쾌락에 탐닉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 역시도 바로 이 영혼의 괴로움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을 어떻게든 막아 보고자 현세의 쾌락에 몸을 담는 것이지요. 세상에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영혼의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고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두 목숨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해서 지성이 조금이라도 형성된 어린아이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체는 성체가 뭔지 알아볼 만한 나이면 초등학생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복음의 구절도 살짝 혼란스러워 보일 순 있지만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목숨’이라는 것의 의미만 조금만 설명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두 문장 속에서 등장하는 ‘목숨’은 2가지의 목숨을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육신의 목숨입니다. 이는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어 죽음과 더불어 마무리됩니다. 누구에게는 짧고 누구에게는 조금 더 길 수 있지만,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계가 있는 이 목숨을 누구나 소중히 여깁니다.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어 목이 마른데 병에 물이 얼마 없으면 아껴 먹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얼마 없고 점점 사라져가니 아까울 수 밖에요. 그런 상황에서 누가 물을 조금 나누어 달라고 하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펄쩍 뛸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목숨은 영혼의 목숨인데 이는 조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 주시는 것인데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혼의 목숨은 채워짐과 비워짐이 있고 깨끗해짐과 더러워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목숨을 잃는 것은 영혼이 공허하고 더러워진 상태를 말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영혼이 충만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영혼을 채우는 데에 필요한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은총’을 얻어내는 법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장 핵심적인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원의 목숨을 위해서 현세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법을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

죽은 믿음과 산 믿음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일입니다. 자극을 주면 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반응을 하겠지요. 그럼 죽은 영혼과 산 영혼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육체의 경우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합니다. 그에게 영적인 자극, 구원에로의 초대가 왔을 때에 죽은 영혼은 반응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 살아있는 영혼은 반응을 하겠지요. 죽은 믿음과 산 믿음을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요? 야고보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잠깐 이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은 영혼은 움직이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죽은 영혼은 '돈을 벌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움직입니다. 반면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도 유념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모든 활동이 믿음의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레지오를 열심히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계모임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레지오 모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구성원 사이의 친교만 열심히 다지면서 정작 성모님의 의중은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레지오라면 그것은 믿음의 실천을 하고 있는 레지오가 아니게 됩니다. 본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엄청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고 열심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본당이 있을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 돌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건축일을 하는 사목위원이 뒷돈을 욕심내며 본당의 커다란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진행시키려고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신앙의 환경을 이용해먹고 있는 것이지 진정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열심해 보이는 외적 ...

수치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제가 사춘기 시절 아이들은 힙합 복장이 유행이었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늘어진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과거의 행실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참 멋있어 보였던 것이 지금은 참 부끄러운 장면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작 당하고 있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잡아 뜯기고, 모욕과 수모를 받는 것이 세상에서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서 저자는 이를 ‘수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당해도 수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저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수치는 하느님 앞에서 ‘불의로운 자’로 판명받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를 의롭다 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어떠한 수치스러워 보이는 취급을 받아도 그것은 수치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행여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으려고 하면서 하느님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일은 이 현세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세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숨겨지는 것이 하나도 없이 우리의 영혼이 빛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음에서 제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제 눈에서 눈물을 거두시고,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하셨나이다.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