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길거리에서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시선에 알몸을 보이는 것은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약속을 바탕으로 하는 상대적인 요소입니다.
한국에서 배를 까고 다니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배를 까고 다닌다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과거에는 통통한 여성들이 부의 상징이자 자랑스러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의 대상처럼 취급됩니다. 세상의 부끄러움은 세상 사람들의 유행과 변덕에 따라 이리 저리 뒤바뀌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시고 변함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수치스러워 하는 것은 영원 안에서 수치스러운 대상이 됩니다. 반대로 그분이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원 안에서 자랑스러운 일이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당신의 최고의 작품이며 가장 자랑스러운 외아들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저마다가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서 이 하느님의 외아들을 달리 받아들입니다. 식당에서 성호를 긋는 것이 부끄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서 내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제가 홀인원 한 걸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애쓰는 가 하면, 수도자가 엄청 값비싼 음식 초대를 받았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 신학교에서 한 친구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험담하고 다니는 신학생도 있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을 마치 부끄러운 일인양 빈정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부끄러움일까요? 잘 성찰해 볼 일입니다. 신앙인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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