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누구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모르는 걸 어떻게 할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다 조금씩 기본적인 '가치'라는 걸 배웁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좋은 건 남에게도 좋고 나에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다는 걸 배웁니다. 아주 기초적인 윤리관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지성이 자라면 보다 고차원적인 사회 관계 안에서 '정의'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법에 따라 해도 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영역인 신앙을 배웁니다. 우리가 가진 기초 위에 '믿음에 근거한 질서'를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당에 왜 나와야 하는 걸까요? 세상적 가치 기준에서는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도리어 나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기준에서는 나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지고한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보통은 여기까지가 신앙인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내던지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신앙의 가치를 재면서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신앙의 가치를 내던지는 이들입니다. 보통 성당에서는 이런 이들을 '냉담자', 또는 '쉬는 교우'라고 부릅니다. 물론 냉담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고 다양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의 비교에서 신앙의 영역에 몸담기보다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낫다는 선택을 하는 것은 변함 없습니다.
이들 보다는 조금 더 나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어두울 수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세속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은 자신의 놀이터 정도에 그칩니다. 마땅히 다른 더 즐겁고 재미난 일이 없기에 신앙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본격적으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특정 영역에서만 신앙인이고 그 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 세속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일관성이 없고 이중적인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심지어 성당 안에서 다른 이들까지 자신들의 세속성으로 이끌어 들이는 이들입니다. 울 안에 들어온 이리떼와 같습니다.
다음 부류는 약한 신앙인입니다. 이들은 겨우 끊어지지 않은 신앙의 명맥으로 살아갑니다. 가장 기초적인 전례에 참례하고 그렇다고 죄는 짓지 않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듣기는 많이 하는데 실행이 없는 이들이 됩니다. 물론 누구나 겪는 일시적인 영역이지만 여기에서 떨어져 나가 냉담자가 되기도 하고 또 올바른 신앙을 형성해 내지 못하면 두 번째 부류, 양의 탈을 쓴 이리떼로 변질되기 쉬운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류는 자신이 믿는 바를 알고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나날이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의 기반을 든든히 쌓아 나갑니다. 이들의 실천은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주고 그렇게 넓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더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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