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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맞선 복순이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태 5,39)

어느 마을의 악덕 부자가 돈을 더 벌고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복순이네 집 뒤에다가 거름창고를 만들어 사람들이 가져오는 거름들을 모을 생각을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부자의 그 계획을 알고 나서는 껑충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가서 창고를 지을 일을 하러 오는 이들에게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창고를 짓는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맡긴 건 부자이고 자기들은 창고를 지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열심히 싸워서 결국 그 일꾼들을 돌려보내고 일꾼들은 부자에게 난색을 표하고는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복순네는 자신들이 이룬 업적에 흐뭇해하면서 그날 밤은 발을 뻗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부자의 마음이 바뀐 게 아닙니다. 부자는 여전히 돈을 벌고 싶었고 더군다나 복순네가 괘씸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은밀하게 일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는 복순네가 일하는 논 주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논마지기를 값을 조금 더 쳐서라도 다 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부자는 그 논의 주인이 되어 복순네를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자는 복순네에 대한 소문을 좋지 않게 내서 주변 사람들이 그 누구도 복순네를 신경쓰지 않도록 해 버렸습니다. 결국 복순네는 그 동네에서 살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로 이사를 떠났지요.

복순이네는 그렇게 그 마을을 떠나 왔습니다. 그리고 이웃 동네로 갔지요. 복순이네는 이번 일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 수 있었지요.
복순이네는 바닥에서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요.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하루 먹을 거리도 구하기 힘든 때가 있었지요. 하지만 복순이네는 좌절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마련하시는 분에게 간청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다른 지방에서 온 한 가족이 집도 없이 떠돌면서 어떤 일이든지 맡겨지는 대로 성실하게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인정 많기로 소문난 김진사에게도 그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김진사는 그들을 불렀고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복순이네는 사정을 설명했고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할테니 굶어죽지 않게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진사는 그들에게 소우리를 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비록 소우리 한 켠에 자리를 마련했지만 더는 이슬과 서리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행복해 했고, 일을 하고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얻어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해 했습니다. 그들은 김진사의 말이라면 하늘의 명처럼 떠받들고 성실하게 일을 했고 결국 그들의 성실함은 김진사를 감명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김진사가 복순이네가 살던 옆동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진사는 그 고을의 수령인 박대감을 찾아뵈었고 대포를 한 잔 나누었습니다. 박대감은 동네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며 투덜대었고 김진사는 집에 일하는 한 가족이 있는데 그 성실성과 정직성은 어디 내어 놓아도 모자람이 없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박대감의 귀가 솔깃해졌고 자기 집에 아주 좋은 자리를 마련할테니 그들을 좀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김진사는 그들을 자식처럼 아꼈기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긴 것에 기뻐하며 그들에게 돌아가 채비를 차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복순이네는 원래 살던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박대감은 큰 신뢰로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직분을 맡겼습니다. 바로 곳간을 돌보는 일이었지요. 그들은 성실하게 일했고 감명한 박대감은 갈수록 더 큰 일을 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예 거의 모든 일을 그 복순이네 가족에게 맡기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한 꾀죄죄한 사람이 청을 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듣자하니 동네에서 잘 나가던 부자인데 자식들의 유산 싸움 때문에 패가망신을 했다고 합니다. 첫째가 둘째를 죽이고 옥에 갇히는 바람에 집안의 명성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고, 보유하고 있던 재산은 셋째가 노름으로 다 탕진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복순이네는 그를 한 눈에 알아 보았습니다. 그가 바로 복순이네를 내쫓은 그 악한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복순이네는 화를 내기는 커녕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가 청하는 것을 기꺼이 들어주고는 살펴 가라고 정성스레 대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자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의 정체를 깨닫지도 못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복순이네는 아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그렇게 원하던 것을 얻어 왔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부인이 따라 들어오면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보 그거 아세요? 복순이네가 돌아왔다는구려?”
“뭐야? 그 괘씸한 놈들! 도대체 왜 또 들어온거래? 내가 그놈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봤는데!!!!”
“듣자하니 박대감네 일꾼으로 들어왔다던데 당신 오늘 거기 다녀오지 않았수?”
“뭐야?!!!!! 제길, 날 봤겠구만. 날 봤을거야. 이게 무슨 창피래 그래. 하지만 거기 재산 담당하시는 분은 참으로 좋은 분이셨어. 보라구 나에게 이렇게 재산을 빌려 주시지 않겠나?”
“그 참 다행이로군요. 이걸로 우리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볼 수 있겠구려.”
하지만 빌려온 부자의 재산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는 낭비벽이 심했고, 자식들은 도박에 주색잡기에 빠져 있었으니까요. 부자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아내와 자식들의 행태에 가슴을 치며 후회했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박대감네 집에 찾아가야 했습니다.
복순이네는 이번에도 부자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안으로 맞아 들였지요. 부자는 황송해 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순이네는 차를 내오라 하고 부자를 극진한 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으리 송구스러운 일입니다마는… 한 번만 더 출전을 해 주실 수 있으시련지요?”
“그건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헌데 지난 번에 내드린 건 어찌 쓰신 건지요?”
“이러 저러한 일에 투자를 하다보니 그만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복순이네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의 가정 상황이 어떤지 말이지요.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모르는 척 속아 주기로 합니다.
“그렇군요. 다시 한 번 빌려 드리지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적은 돈도 아니고 이렇게 아무 보증도 없이 빌려 드리는 건 저희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달리 도와드릴 일은 없는지요?”
“나으리, 이건 궁금해서 여쭤보는 것인데 혹시 여기 일하는 식솔들 중에 ‘복순이네’라고 잘 알고 계시는지요?”
복순이네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잘 알고말구요. 어찌 물어보시는지요?”
“아니, 그 놈들이 돌아왔답니다.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길래 멀리 쫓아 보내었는데 다시 돌아왔다지 뭡니까?”
“그러시군요. 그래, 그들이 뭘 그리 잘못했답니까?”
“아니 뭐… 제가 하는 일을 얼마나 막아섰는지 모릅니다.”
“그래요? 무슨 일을 하시려 했는데요?”
부자는 머뭇거렸지만 결국 입을 열었습니다.
“그 복순이네 집의 근처 공터에 거름창고를 지어 돈을 좀 벌 궁리였지요.”
“그리하면 그 집에서 역한 냄새 때문에 살기가 힘들지 않겠습니까?”
부자는 복순이네와 있었던 일 때문에 홧김에 변명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 돈을 출자한 분에게 대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을 아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고 사실 그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 그렇지요.”
“아마 복순이네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어르신에게 맞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용서 하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복순이네는 다시 극진한 대접과 함께 부자를 돌려 보냈습니다. 부자는 기분이 좋아 흥얼 거리면서도 자신의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길에 문지기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습니다.
“이보게나, 여기 복순이네가 도대체 어디서 일하고 있는가?”
“아니, 어르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방금 어르신과 함께 걸어나오던 이가 복순이네 아닙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저 높은 어르신을 모욕하지 말게나.”
“제가 어르신과 농을 주고 받겠습니까? 방금 어르신을 모시고 걸어나온 이가 바로 복순이입니다.”
그제서야 부자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지요.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문지기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부자의 뒤에서 커다란 대문을 다시 닫고 부자를 홀로 남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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