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의 직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의 상황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릇이 깨어져 있는데 아무리 향기로운 향유를 받아들이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 새어 버리고 말겠지요. 먼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의 상태를 올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지독히 이기적인 상태인데 그것을 신앙이라는 활동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의 사소한 결함 하나도 견디지 못하면서 정작 나의 결함은 지나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것들을 올바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어느 성인과 같은 정도로 간주하고 무턱대고 좋은 것에 대한 ‘메뉴얼’을 찾곤 하지요. 그러니 그러한 것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잠시 관심을 끌다가 그만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향 설정
다음으로는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방향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들은 어렴풋이 하느님이라는 분을 들어는 보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이 진정으로 착한 것인지는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악을 행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봉사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보다 중요한 것들을 망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향설정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하기도 해서 방향설정을 도와줄 수 있는 분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이지요. 자기 스스로 사물들을 올바로 분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겸손과 순명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향 설정은 당연히 하느님과 그분의 선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말로는 단순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부닺히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른 방향 설정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과의 단절
올바른 방향이 설정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 방향에 어긋나는 것들을 끊어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참새가 발목에 쇠사슬을 묶고는 절대로 날아오를 수 없는 법이니까요. 우리는 가장 굵은 쇠사슬부터 가장 가느다란 쇠사슬까지 모두 끊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 쇠사슬이 존재하는 이상은 우리는 날갯짓을 연습할 수는 있지만 날아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심을 해야 하고 어둠을 끊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둠이라는 것, 하느님과 어긋나는 방향이라는 것이 무조건 외적으로 극악무도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반대인 경우도 많습니다. 언뜻 종교적으로 바람직해 보이는 무언가가 실제로는 나를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여기에는 분별이 필요한 셈입니다. 대학교재는 대학생들에게는 정진을 위한 도구가 되지만 유치원생에게는 가방의 무게를 더하는 짐일 뿐입니다. 언뜻 대학 교재는 고급스러워 보이고 모든 이에게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도 있는 것이지요. 유치원생들은 열심히 놀고 ‘가나다’나 겨우 배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덕의 훈련
악습이 어느정도 정돈되고 나서 나를 가두는 쇠사슬이 정리되면 그때부터 나는 길을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악습을 정리하는 데만 해도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작업을 이루어 낸 사람,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그 일을 이루어 낸 사람은 비로소 덕을 훈련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는 보석과 같은 소중한 가치와 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쓰고 우리의 의지를 더하는 만큼 닦이고 가꾸어져 나가게 됩니다. 인내, 겸손, 사랑, 친절, 온유, 절제, 선행, 자선 등등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쓰는 만큼 더욱 소중한 가치로 바뀌게 됩니다. 안쓰던 공구들은 녹이 잔뜩 슬어 있지만 우리가 그러한 공구들에 녹을 벗기고 기름칠을 하고 닦고 하면 언제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도구들을 쓸 수 있게 되고 또 쓰는 만큼 능숙하게 되지요.
십자가
이 덕의 훈련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그것이 이제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절대로 십자가 그 자체를 기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십자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희망하기에 그 십자가를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죽음을 안겨 주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크나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그 십자가를 껴안게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몫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은 얼마든지 드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그 일은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어떤 영혼에게라도 이 선물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 선물을 내던지는 영혼만큼은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비의 영역이지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의 변덕 앞에서 어찌하실 수 없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교통정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당신을 거부하는 영혼들에게는 그들에게 합당한 것을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낙원을 선물하시지요.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고 하느님에게는 당신의 몫이 있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제 이 성경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뒤를 따른다는 것은 위의 ‘방향설정’에 관한 이야기이고,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둠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른다는 것은 ‘덕의 훈련’과 ‘십자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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