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남탓을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책임’의 무게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내가 책임지기 싫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는 것은 그 가족의 무게를 책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한 사람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싶으면 자꾸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 주변을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릇된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유혹에 빠져들어 가정을 내팽개치고 자신이 즐기는 활동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세상의 수많은 직분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게 된 이름들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요. 의사는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은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하지요.
그러나 신앙의 무게를 지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 즉 자신의 자유의지의 동의로 이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이 즐기는 것이 있으니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법만 지키고 나면 나머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나는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았으니 저녁에는 술을 좀 과하게 먹어도 여전히 나는 신앙인으로 남아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그가 과하게 먹고 자신의 건강과 이웃과의 관계를 망치는 그 술로 인해서 그는 그가 참례한 주일미사의 의미마저도 퇴색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도망갈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취’될 수 있고 ‘중독’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앞에 두고도 하느님이 없이 살아가는 ‘착란’상태에 머무를 수 있지요.
사실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무언가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술과 담배만이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한 활동과 관심도 사람을 중독시키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활동들은 우리를 중독 시킨다고 할 수 있지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허송세월을 하게 됩니다. 소중한 시간들, 사랑하는 데에 써야 할 시간들을 세상의 헛된 활동에 모두 쏟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돈을 조금 더 번다한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 돈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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