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를 사랑합니다. 뜻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소중히 여기고 그 가능성을 더욱 넓히려고 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것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신앙에 몸담는 이들이 부딪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명'이라는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 순명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바와 상충되는 다른 사명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굴종'은 아닙니다. 순명은 나의 뜻이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이 무조건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그 직전에 우리에게 가장 온전한 형태의 자유를 제시합니다. 즉, 순명의 대상 자체를 수용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분명히 있고 그 뒤에 순명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명은 사실 우리의 자유가 가장 온전하게 꽃피는 순간입니다. 상대의 명을 따르기를 나 스스로의 자유로 결정하는 상태, 그것이 순명의 올바른 상태인 것입니다.
올바른 순명을 위해서는 올바른 식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식별은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사명이 진정 누구에게서 비롯하는 것인지에 대한 검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에 따르기 위해서 순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태초부터 의도하신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순명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본래적으로 의도하신 안식일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선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올바른 분별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전통을 넘어선 하느님의 본연의 뜻을 완수하고자 그 일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순명에 실패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 어떤 명령이든지 거부하고자 하는 나의 엇나간 자유가 저변에 깔려 있고, 이어 나에게 다가오는 사명에 대한 겉핥기식 분별도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영리함보다 뛰어나다는 확신, 거기에서 비로소 올바른 순명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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