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천사들이 거두어 내게 될 사람들의 목록입니다. 하나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입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서 조금 더 상세하게 알아 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을 참으로 많이 곡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죄라는 것을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올바른 정법을 어기는 것은 죄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올바른 정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죄를 짓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어린아이들이 어떤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들을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올바른 인지가 필요하고(이성적 이해), 그리고 그 행위에 의지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죄스런 일의 경중도 문제가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모기를 죽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죄의 학구적인 탐구를 벗어나서 우리가 올비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죄인 것일까요?
바로 이 죄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 설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죄 아닌 것을 죄라고 하고 또 반대로 죄인 것을 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기 스스로 죄라고 설정한 행위는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죄짓게 하는 행위를 자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무언가를 배우는 데에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게 마련입니다. 특히나 가톨릭의 전례 행위는 처음으로 성당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틀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의 죄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이미 신앙 생활을 30년 40년씩 해 와서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이가 바라보기에 그들은 그야말로 배우지 못한 엉망인 사람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이라 그 초짜 신자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아주 아름답게 바라보실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속내를 숨기고도 얼마든지 외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것은 곧잘 이 외적인 요소들이 되는 것이지요. 묵주기도를 몇 단을 바쳤는지, 평일에 얼마나 미사에 참례하는지와 같은 외적인 분명한 척도들이 우리의 신앙을 가늠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올바로 해 내지 못하는 이는 ‘죄인’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는 때로 우리가 이미 지닌 소위 ‘기득권’을 바탕으로 그것에 다가서려는 이들을 배척하곤 합니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우리가 남을 죄짓게 하는 행위가 됩니다. 약한 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고 이끌어주지는 못할 망정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불의는 바로 그런 내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들어높이고 다른 이를 무시하는 행위가 바로 ‘불의함’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눈에는 우리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 정말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전지대에 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이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은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이라고 생각했던 겸손한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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