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판관 6,15)
사수성당을 짓고 나서 ‘임시 성전’이라는 미명 하에 봉헌식도 대리구 식구들만 모아서 조촐하게 했습니다. 교구 전체에 알릴 거리가 안된다는 것이었지요. 대구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입니다. 아직도 밖에 나가서 ‘사수성당’에 있다고 하면 거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또 어떻습니까? 친척 중에 추기경님이나 주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재력이 대단하시거나 명예가 드높은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고위직 신부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야말로 근본없고 보잘 것 없는 신부인 셈이지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하느님은 가장 보잘 것 없는 데에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판관기의 기드온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씨족이었고 기드온 자신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였지만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판관으로 나서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을 선물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재력이나 위대한 권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당신이 쥐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의지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달려가 그와 함께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하시지 않을까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분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대상은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대상을 고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대상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대상을 고르시어 그를 당신의 은총으로 축복하시고 사람들 앞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그들은 절대로 스스로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시고 그에 합당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하느님 앞에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수많은 사제들이 많으니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라고 말이지요. 그렇지만 이 보잘 것 없는 이라도 당신이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저는 맡겨 드릴 뿐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판관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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