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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과정



용서는 외부에서 강압에 의해서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흔히 '은총'이라고 표현되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맞지만, 그 용서를 올바로 얻어내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회개'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폭포수 밑에 빈 병을 들고갑니다. 하지만 그 빈 병에 뚜껑이 덮여 있다면 폭포가 아무리 거대하고 수량이 많더라도 병 속에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병이 뒤집어져 있다면 그나마 병 속에 조금 있던 물마저도 밖으로 빠져 나갈 것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병 주둥이를 폭포가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야 하고 또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폭포수가 그 안에 쏟아져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용서의 현실을 바라봅시다. 우리는 매번의 고해성사, 한국에서는 '판공성사'를 통해서 합당하게 용서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위의 묵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를 보는 그 순간마저도 사실은 죄를 그칠 의도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때가 되어서 판공을 보러 온 것이라면 과연 그 용서가 올바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합당한 의심이 들게 됩니다.

물론, '고해성사' 그 자체를 통해서 병의 뚜껑이 열릴 수도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면담성사'를 원합니다. 면담의 과정을 통해서 사제의 영적 능력으로 자신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요소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원래 본인이 해야 할 의지의 변화가 사제를 통해서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회개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아무리 좋아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바란다면 먼저 우리를 살펴보고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용서는 절대로 '자동으로' 혹은 '외부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용서는 결국 자신이 스스로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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