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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해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이라는 곳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위에 높이 펼쳐져 있는 물리적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은 영적인 높이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드높은 곳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가까운 곳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기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들은 천상의 하늘이 아니라 지상의 보다 높은 곳을 추구하기가 일쑤입니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영예를 추구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리고 그렇게 올라간 높은 곳에서는 당연히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나이가 들면 노화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조심조심 모아오던 재물이 일순간에 날아가는 일도 흔하지요. 학식을 통해 명예를 얻기 기대했지만 공부한 것을 잊어가기도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불명예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늘은 전혀 다른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하늘이라는 영역은 절대로 다른 요소에 의해서 침범될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잔인한 주인이나 엄격한 임금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만나게 되고 형성하게 된 아버지상과는 참으로 다른, 성경의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늘 창가에 서서 행여라도 돌아올지 모르는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의 아버지, 돌아온 둘째 앞에서 짜증을 내는 첫째를 향해서 부드러운 충고를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는 선하고 자비로우며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신 분, 심지어 어머니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으실만큼 따뜻하고 정감있는 분이십니다.

이번 한 주간,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다가서는 진실한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전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이름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아지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강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다가옵니다. 또 어떤 색다른 사물을 발견하거나 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가장 먼저 그 이름을 찾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바로 아버지를 드러내는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이름 안에는 많은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 이름을 ‘하느님’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지만 그 하느님은 다른 언어권 안에서, 혹은 다른 문화 안에서는 전혀 다르게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그 하느님이라는 명칭이 곧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부르기 위해서는 그분이 지니신 뜻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지닌 사랑으로 그분의 이름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이 논문 지도를 받은 교수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는 사고를 쳐서 그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학업을 바탕으로 그 이름을 빛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드러내고 싶은 이름, 그것은 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빛내기 위해서는 바로 이 ‘사랑’이라는 과제를 수행해 나가야 합니다. 때에 찌든 황금을 빛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하듯이 마찬자리고 그분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낡은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위해서 성실히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사랑이신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환히 드러내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나라, 국가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한 나라에는 그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존재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나라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고 지도하시는 운명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저마다의 나라는 그 수장의 지도력에 따라서 구체적인 운영 지침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현세의 세상은 힘과 권력, 재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그 운영의 핵심 원동력이 되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획득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운명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더 많은 힘과 재력을 얻은 이는 위로 올라가고 그렇지 못하면 아래에서 신음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나라는 전혀 다른 통치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권력이나 재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 주된 관점이 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루카 19,17) 

그리고 그 아버지를 향한 충실도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 안에서 가장 작은 이를 향한 일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의 나라는 안타깝게도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나라가 오길 기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 나라가 온다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그 나라를 알아서 만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그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나라는 아버지에게서 오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그 나라를 나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실천해 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그분의 사랑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나라, 가장 작은 이에게서 실현되는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 주변에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이번 한 주간을 잘 꾸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곳, 즉 하늘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땅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를 선물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자유가 없는 존재는 사랑을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랑을 하라고 나누어 준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은 정반대의 행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를 신으로 삼고 우상을 만들고 이기심을 추구하면서 도리어 하느님을 적대시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실행하려는 이들마저 가로막는 악한 의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23,13)

하지만 선한 이들은 때로는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또 때로는 뱀처럼 영리하게 언제나 그 실행방법을 찾아내고 다시금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완전히 실행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만연해 있는 이교사상과 적대감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봉은 물론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가장 완전하게 실천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길을 따라걷는 우리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그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땅에 속한 모든 이로부터의 ‘미움’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르 13,13)

이번 한 주간, 아버지의 뜻을 듣기만 해서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먹지 않고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나날이 섭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꾸준히 밥을 먹습니다.

육신이 그러할진대 영혼은 어떨까요?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양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성과 감성이 존재하고 그러한 것들에 적절한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이성은 배워야 하고 감성은 보살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업에 열중하고 또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영혼은 ‘사랑’이라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은 원초적인 욕구 충족을 제외하고는 ‘사랑받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새로운 옷을 구입하는 것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이고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는 것도 외로워서 애정이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이러한 모든 욕구들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채움은 일용한 것, 즉 하루 하루 필요한 것을 채우는 데에 충분한 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채움을 미리 당겨서 비축해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돈을 욕심내는 사람은 결코 자신이 벌어들이는 것을 즉각적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에 아무리 값비싼 요리를 먹어도 돈이 많은 이들이 비축한 돈을 다 쓸 재간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모으는 이들은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을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분히 채우도록 세상을 마련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은 저마다의 이기심으로 자신이 소비할 것과 더불어서 타인의 몫도 빼앗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극도의 빈곤이 생겨납니다. 서로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번 한 주간 동안은 우리가 가진 것(시간, 노력, 재물, 지식 등등)을 그것이 절실한 이와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채우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용서는 관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주제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과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주제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랑스러운 것만 사랑하느냐, 아니면 사랑스럽지 않은 것도 사랑할 수 있느냐? 라는 질문과도 연계된 것입니다.

지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거래’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주면 받는 것이고 받으면 주는 것이 바로 거래이지요. 그래서 용서라는 개념도 거래를 바탕으로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내 용서를 받아 마땅하지’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지상에서만 살아간다면 그 거래는 정당할지도 모릅니다. 뜬금없이 내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엄청난 것을 내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어내셨고 또 그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나아가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수용하는 이들이 우리들입니다.

즉, 우리가 먼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용서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 받고 용서를 한껏 받았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그 사랑과 용서를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미 먼저 사랑 받은 것에 대해서만 돌려준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 5,46)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용서는 우리와 좋은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목하는 이들, 우리와 관계가 틀어진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꾸로 보면, 우리가 먼저 용서를 시도할 때에 우리는 이미 하느님에게 용서받은 이들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그를 용서하려고 노력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가득 내려오리라 믿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유혹이라는 것은 물론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의 내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유혹받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욕구’라는 것이 있고 바로 그 욕구에 따라서 유혹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맛있는 밥을 사준다는데 마음이 혹하는 사람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고 좋은 옷을 사준다는데 마음이 혹하는 사람은 ‘이쁜 것’을 좋아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외부의 요소를 모조리 차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내면 안에 어떤 욕구를 형성해 두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오염되지 않도록 무균실을 만드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절대로 집밖에 나가지 않고 비닐 텐트 안에만 있으면 모를까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한 사람에게 ‘면역력’이 형성되어 있다면 어느정도 세균에 노출이 되더라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이와 같은 움직임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유혹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혹의 요소들이 많은 가운데에도 더한 욕구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이 올바로 형성될 때에 세상의 유혹에 올바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들어서게 됩니다.

사실 세상은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유혹거리들을 모조리 마련해 둡니다. 누군가에게는 돈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륜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권력으로 그가 빠져들만한 구멍을 미리미리 만들어 둡니다. 그래서 우리가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맞닥뜨려 살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 안에 참된 사랑을 갖추어야 합니다. 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하고 그렇게 분별해 낸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을 정비해 두어야 합니다. 결국 유혹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준비 태세에 따라서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요소가 됩니다.

이번 한 주간은 내가 쉽게 빠져드는 유혹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그와 반대되는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내 안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하느님께서 신비로움 그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도 신비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도 신비의 영역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악이라는 것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언가, 즉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신비롭지만 그것이 실제로 드러날 때에는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악이라는 것도 신비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드러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그 악의 실제적인 체험으로 고통 당하고 있습니다.

유혹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유혹의 상황에 놓인다고 해서 그것이 그 자체로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유혹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자극해서 유혹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유혹을 극복하고 더 큰 선을 이루게도 도와줍니다. 칼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사람을 찌르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요리를 할 수도 있고 생명을 살리는 수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에 굴복해서 악에 빠진다고 그 즉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자께서는 심판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들이 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구원을 이루러 오신 분이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대신 악의 희생물로 내어줌으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수많은 수련을 쌓고 율법적 엄정함을 지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악에서 벗어나려면 그 악에서 구할 수 있는 분의 손을 마주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고 그분의 손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의 마지막은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 이미 형성되어 있는 악습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분에게 의탁하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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