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8장, 9장
위에서, 아래에서
위에서 온 이와 아래에서 온 이의 한 판 토론이 벌어집니다.
위에서 온 이는 마치 복잡한 미로를 위에서 관망하듯이 모든 걸 꿰뚫고 있고,
아래에서 온 이는 도무지 위에서 온 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하느님에게서, 진리에서, 사랑에서 오신 분이고,
저들은 아래에서, 물질세계에서, 거짓에서, 증오에서 온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깨닫고 있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저들은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다툼이 언제나 끝날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 온 이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돌을 들어 예수님에게 던지려 하고,
예수님은 황급히 몸을 피해 달아나십니다.
위에서 온 이라고 피할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날라오는 돌을 맞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저로서는 하루하루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는 새 버전의 바리사이인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뭔가 '확실하게 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확실한 것 가운데 보다 확실히 전해지고 있는 하느님의 규범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더러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안의 어느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고 가장 적합한 자리를 주시겠지요.
그건 제가 걱정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더 큰 사랑을 위해서 허락되는 바,
보다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 눈에 보이면
그 자리를 잃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도록 해야겠지요.
여전히 저는 오류가 많고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늘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머무르실 것을 압니다.
이제는 그런 단계의 의심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성경강의가 마치 개인 신앙고백처럼 변해버리는 느낌이지만,
이 관점 안에서만 요한 복음의 이 자리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드러나는 것이 태생소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그의 병력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그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지라 모든 이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그를 치유함으로써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고위 사제들의 위선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치유를 받았고,
그 치유로 인해서 그 역시도 성가신 꼴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와서 똑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눈을 떴느냐?"
그는 모르긴 해도 수도없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똑같은 대답,
틀릴 수가 없는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태생 소경이던 그가 눈을 떴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직접적인 진술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대하는 이들, 예수님을 대하는 이들은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에서
위에서 온 이와 아래에서 온 이의 한 판 토론이 벌어집니다.
위에서 온 이는 마치 복잡한 미로를 위에서 관망하듯이 모든 걸 꿰뚫고 있고,
아래에서 온 이는 도무지 위에서 온 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위에서, 하느님에게서, 진리에서, 사랑에서 오신 분이고,
저들은 아래에서, 물질세계에서, 거짓에서, 증오에서 온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깨닫고 있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저들은 그분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다툼이 언제나 끝날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래에서 온 이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돌을 들어 예수님에게 던지려 하고,
예수님은 황급히 몸을 피해 달아나십니다.
위에서 온 이라고 피할 수도 있는데 무턱대고 날라오는 돌을 맞으란 법은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감이 오십니까?
저로서는 하루하루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는 새 버전의 바리사이인들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뭔가 '확실하게 규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모든 확실한 것 가운데 보다 확실히 전해지고 있는 하느님의 규범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더러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제가 가야할 길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안의 어느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는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고 가장 적합한 자리를 주시겠지요.
그건 제가 걱정할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더 큰 사랑을 위해서 허락되는 바,
보다 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곳이 눈에 보이면
그 자리를 잃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도록 해야겠지요.
여전히 저는 오류가 많고 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늘 하느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와 함께 머무르실 것을 압니다.
이제는 그런 단계의 의심을 벗어버리게 되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성경강의가 마치 개인 신앙고백처럼 변해버리는 느낌이지만,
이 관점 안에서만 요한 복음의 이 자리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드러나는 것이 태생소경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그의 병력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보다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그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지라 모든 이에게 잘 알려져 있었고,
그를 치유함으로써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 고위 사제들의 위선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치유를 받았고,
그 치유로 인해서 그 역시도 성가신 꼴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와서 똑같은 질문을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떻게 눈을 떴느냐?"
그는 모르긴 해도 수도없이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똑같은 대답,
틀릴 수가 없는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태생 소경이던 그가 눈을 떴다는 엄연한 사실을 눈 앞에 두고
그의 직접적인 진술을 들으면서도
사람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대하는 이들, 예수님을 대하는 이들은
이처럼 극명하게 갈라집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