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름에 포기해야 할 것들
연중 26주 수요일
오늘 복음은 나 스스로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라 더 의미가 깊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더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 때,
하지만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일 때,
그것을 극복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이런 상황에서 살짝 혼란스러움이 온다.
사실 그동안 불필요한 것들(따지고 보면 다 필요한 것들이지만 아예 따지기를 포기했다.)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는 작업을 했다.
그러니 사실 몇개 남지 않았다.
하느님과 나, 그리고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할 일들...
그 밖의 내 취미라던지, 기호, 막연한 강박관념같은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배 바깥으로 내어던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더 명확해 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오늘 복음의 말씀들이다.
"머리 둘 곳"
"아버지의 장사"
"가족들과의 작별인사"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 것 같은가?
머리 둘 곳은 최소한의 안식처를 말한다.
이는 육체적인 안식처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든 감정적이든 어느 곳이든 어떠한 피난처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것들에 기대지 말라고 하신다.
이제는 누워 옹알거릴때가 아니란 이야기다.
나서서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이는 '안락'(세상의 행복)에 대한 우리의 미련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장사는 인간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는 일,
특히나 그것이 아버지라는 존재라면,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동감하는 일이고 동조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어디까지나 '죽은 자들',
즉, 세상에 속한 자들이 신경쓰는 최고로 존중해야 할 일이다.
세상의 논리 안에서 가장 존중되어야 할 일이지만,
하늘나라의 일꾼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죽은 이들의 일에 불과하다.
(이 말인 즉슨 부모 장례때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 선포자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죽은' 일들로 대변되는 것들에서
마음을 돌리라고 하신다.
이는 '사물', '대상'(주로는 '재화')에 대한 우리의 미련을 끊을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의 가족들과의 작별인사는 무엇을 말할까?
이번에는 죽은 이가 아니라 산 이들에 대한 의무이다.
헤어진다면 적어도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그 전별이라도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예수님은 그마저도 '미련'이라고 칭하신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었다면,
심지어는 살아있는 이와의 관계 조차도
그 앞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미련을 끊을 것을 의미한다.
여전히 나는 서술한 이 3가지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육적인 '안락'을 추구하며, '사물'들에 묶여있고, '관계'에도 얽매여 있다.
어느 날엔가 이 모든 것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졌을 때에야,
'하느님의 뜻'이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고,
비로소 이 세 가지 것들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목적들이었던 이것이
이제는 '수단'으로 바뀌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더 큰 힘을 실어줄 것으로 믿는다.
이는 본인의 자기고백적인 성격의 글로써,
설령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너무 마음쓸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