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마르코 13장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언급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득 담긴 장이다.
당시의 정황과 세상의 최종적인 종말의 모습이 섞여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지만,
주제는 명확하다.
그건 바로 "깨어 있어라"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선교하라"고 하신것 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예수님의 "깨어 있으라"는 이 명령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큰 주제들을 짚어주면 다음과 같다.

무서운 일들의 닥침(문제)
그리스도인들의 시련(시련)
두려워하지 말기(두려움의 극복)
끝까지 인내하기(인내)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참 그리스도의 다가옴
그 날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심.

=> 결론: 세상 종말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언제? 어디? 어떻게?) 말고 늘 깨어 있으라.

1. 무서운 일들의 닥침(문제)
사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주변에 상존한다.
그것이 세계적인 대재앙이든 우리 가정 안의 사소한 문제이든,
언제나 문제, 무서운 일들,
즉 우리의 '두려움'을 자아내는 일들이 존재한다.
이 일이 일어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일은 모든 세대에 늘 존재해왔다.

2. 그리스도인들의 시련(시련)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시련과 더불어 살아간다.
시련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 시련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시련인지,
아니면 자신의 변덕으로 생겨나는 시련인지는 잘 구분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데에서 일어나고
자신의 변덕으로 생기는 시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일어난다.
많은 이들이 지 하고 싶은대로 하다가 생겨나는 시련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곤 한다.
정신나간 족속들이 많다.

3. 두려워하지 말기(두려움의 극복)
두려움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극복 가능한가?
두려움은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명확히 아는 대상은 적어도 그에 맞서 준비를 하던지
능력이 안되면 도망을 칠 수 있다.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것, 암흑과 어둠 속에서 나온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선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니면 빛이신 분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분이 나를 이끌어주시도록
그분에게 나를 맡겨야 한다.
돈이건, 미래건, 직장이건, 관계이건, 병마이건...
당신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들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인 하느님의 손을 꼭 잡으라.

4. 끝까지 인내하기(인내)
두려움을 순간 이겨낸다 하더라도
또다시 밀려오는 유혹의 고리에 분명 용기를 잃게 되는 것이 수순이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이 '인내'이다.
단 한 번 파도를 이겨내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다시 밀려올 파도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인내인 것이다.
참고 참고 또 참으면
어느샌가 내성이 생겨서
파도가 밀려와도 덜 힘들이지 않고 맞설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인내이다.

5.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1.2.3.4.를 꾸준히 견뎌낸 그리스도인들은
'기만'에 대비해야 한다.
겉꾸민 자신을 교묘하게 드러내면서
마치 자신이 '구원'인 양 속이려는 존재들이 상존한다.
특히나 이런 일들은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자주 출몰하게 된다.
정말 철떡같이 믿었던 한 신부님이
사실은 정반대의 모습이었다거나
교회는 그러지 않았으리라 했는데
자신을 배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 뿐이다.
그분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매달려서는 안된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아무리 멋들어지게 흉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매달려야 할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뭐에 실망해서 성당 나오지 않겠다는 이들이
대체로 이런 거짓 그리스도에 매달려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그리스도를 붙들도록 온 마음으로 다시 초대해야 할 것이다.

6. 참 그리스도의 다가옴.
NO DATA
성경에는 이렇게 저렇게 설명해 두었지만, 그건 각자 읽어들 보시고
난 이 날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굳이 말을 하라면,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느님밖에 모른다는 거다.
그래서 나오게 되는 결론이 다음과 같다.

결론:세상 종말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언제? 어디? 어떻게?) 말고 늘 깨어 있으라.
문제는 늘 상존한다. 그것을 단순한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인생의 시련으로 받아들여, 두려움을 이겨내고, 끝까지 참아내고, 속지 않도록 주의해서
"늘 깨어 있어라"!!!!!!!!!!! 는 것이 결론이다.
늘 깨어 있어라.
늘...
언제나...
늘... 깨어 있어라.
잠 자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영혼의 민감성을 곤두세우고 어둠에 맞서 저항하고 선한 것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