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직분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해야만 하는 직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설교자들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죄악에 있던 아니던 그것 역시도 중요치 않다. 일단 설교의 자리에 올라야 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늘 옳은 말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말 자체의 사용이 틀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릇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좋지 않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든 저러든 어떻게든 아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는 것이다(정말 정신이 나가서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줄구장창 이야기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설교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필시 사전에 연락을 듣고 무슨 조치가 취해져도 취해지게 될 것이다.)
설교자의 맞은 편에는 '듣는 사람', 즉 청중이 있다. 청중들 역시 제각각이라 누구는 그른 것도 바로 해석해 내고, 누구는 바른 것도 그릇되이 해석해 낸다. 제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의 지식 수준에 따라 설교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 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또 각자의 직업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같은 과목의 교수라도 누구는 설교자의 말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누구는 설교자의 말투와 지식의 수준을 한탄하며 그 안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환경적인 걸 떠나서 청중의 내면에 어느 부분이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을 나름 잘 '걸러내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의 능력에만 기대지 아니하고 다른 한 편으로 청중의 능력에만 달린 것도 아닌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안에 가장 무엇보다도 '영의 연결'이 전제되는 것이다. 청중은 그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지 그 안의 설교자의 영을 식별하고 그 영적 양식을 자신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교자의 영이 뒤틀려 있으면 아무리 화려한 문체의 설교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고, 반대로 청중의 영이 뒤틀려 있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과 완벽한 설교라도 그릇되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결국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설교'라는 것은, 신학도, 문법도, 수사학도 아닌, 영의 준비가 최우선 되어야 한다. 기실 앞서 말한 부분(신학, 문법, 수사학, 설교학)들은 신학교를 나오면 최소한은 준비가 되어 나온다. 그러니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설교자의 영의 준비인 것이다. 굳이 '사제'와 '강론'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교리교사와 반장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고,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설교자들이다. 내가 하느님의 말을 하고자 할 때에 내 영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청중들의 영의 상태도 잘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청중들의 영의 상태를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 지쳐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너무 들떠 있는 이들에게는 지도의 말을 내릴 정도의 분별력은 있어야 한다. 신앙학교 간다고 들떠있는 아이들에게 '절제'를 배울 수 있는 적절한 말을 해 주어야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유가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또 죽음을 통해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하여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해야만 하는 직분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설교자들이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죄악에 있던 아니던 그것 역시도 중요치 않다. 일단 설교의 자리에 올라야 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늘 옳은 말만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말 자체의 사용이 틀릴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릇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좋지 않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든 저러든 어떻게든 아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하느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말을 하는 것이다(정말 정신이 나가서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줄구장창 이야기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설교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필시 사전에 연락을 듣고 무슨 조치가 취해져도 취해지게 될 것이다.)
설교자의 맞은 편에는 '듣는 사람', 즉 청중이 있다. 청중들 역시 제각각이라 누구는 그른 것도 바로 해석해 내고, 누구는 바른 것도 그릇되이 해석해 낸다. 제 각각의 자리에서 자신의 지식 수준에 따라 설교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 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또 각자의 직업과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같은 과목의 교수라도 누구는 설교자의 말을 겸손되이 받아들이고 누구는 설교자의 말투와 지식의 수준을 한탄하며 그 안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환경적인 걸 떠나서 청중의 내면에 어느 부분이 설교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을 나름 잘 '걸러내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은 단순히 설교자의 능력에만 기대지 아니하고 다른 한 편으로 청중의 능력에만 달린 것도 아닌 둘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안에 가장 무엇보다도 '영의 연결'이 전제되는 것이다. 청중은 그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지 그 안의 설교자의 영을 식별하고 그 영적 양식을 자신의 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교자의 영이 뒤틀려 있으면 아무리 화려한 문체의 설교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이고, 반대로 청중의 영이 뒤틀려 있으면 아무리 좋은 내용과 완벽한 설교라도 그릇되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결국 하느님에 대해서 하는 '설교'라는 것은, 신학도, 문법도, 수사학도 아닌, 영의 준비가 최우선 되어야 한다. 기실 앞서 말한 부분(신학, 문법, 수사학, 설교학)들은 신학교를 나오면 최소한은 준비가 되어 나온다. 그러니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것은 설교자의 영의 준비인 것이다. 굳이 '사제'와 '강론'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교리교사와 반장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고,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모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말씀의 설교자들이다. 내가 하느님의 말을 하고자 할 때에 내 영의 상태를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청중들의 영의 상태도 잘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청중들의 영의 상태를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 지쳐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너무 들떠 있는 이들에게는 지도의 말을 내릴 정도의 분별력은 있어야 한다. 신앙학교 간다고 들떠있는 아이들에게 '절제'를 배울 수 있는 적절한 말을 해 주어야 하고, 장례식장에서는 유가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또 죽음을 통해 영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하여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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