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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자선활동

교회의 자선활동

'자선'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어렴풋이 알아듣는 것은 우리가 가진 뭘로 남을 구제하는 일이다. 이는 돈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노력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자선'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시내에 손을 벌리고 있는 거지들이고 그들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주는 것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자신이 성공할 때에 더 큰 규모의 자선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조금 점검받을 필요가 있다. 진정한 자선, 진정한 구제사업이라는 것은 정말 그 사람이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수억의 돈을 그 손에 쥐어준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을 망칠 수 있다. 진정한 자선은 그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모범을 살펴보자. 베짜타 못의 그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셨다. 왜 그 모두를 구제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명만 고르셨으며 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그가 가장 오래 고통받고 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거기에만 집착한다면 더 큰 틀을 망각하는 셈이 된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극명히 드러내고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지, 그 병자 자신의 고통과 치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모든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결국에는 생명을 잃은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그 소녀도, 과부의 아들도, 나자로도 모두 다시 죽음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자선행위는 결국 그 순간 하느님의 뜻을 최대한으로 이루어내기 위함인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 자신의 수난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 소경을 치유한 적도 있다. 자신에게 예비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태생소경을 치유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늘 교회의 도움을 받던 가족이 있는데 이제 생활이 어느정도 나아졌고, 다시 일할 기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도움을 끊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선'의 시작이다. 그러지 않고 계속 주던 도움만을 주게 되면, 결국 자생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오히려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냄비근성의 한국인들이라 뭔가 터졌다 하면 일단 돈부터 모아주려는 모습이 많다. 이태석 신부님 이후에 톤즈 공동체도 분명 갑자기 들어오는 지원들에 윤택한 삶을 일시적으로 누리겠지만, 자신들의 필요 이상으로 들어온 것들에 분명 어두운 면들도 적잖이 많이 생겨났으리라 생각한다. 진정한 자선은 물량을 쏟아붓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자선은 그들이 살 길을 찾아주는 것이고, 나아가 그들이 기본적인 삶을 회복하였을 때에 하느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도움을 요청하며 교회를 찾는다. 한국은 이런 케이스가 덜하고 와봐야 기껏 500원이나 1000원의 푼돈이면 해결되는 경우들이다. 하지만 선교지에는 작정을 하고 교회를 통해서 한 몫 뽑아보려고 '거짓'으로 무장한 채로 오는 이들도 많다. 모쪼록 사제들의 영적 시야가 열려서 이런 이들을 잘 분별해 내고, 또 나아가 진정 도움이 필요한 이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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