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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연중29주주일)

연중 29주 주일
(한국은 전교주일이라서 복음이 다릅니다.)
마르코 10, 35-45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

우리의 일상 활동 중에는 굳이 '남 위에 올라서야'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저 내 자리에서 묵묵히 나의 일을 하면 되는 것들입니다. 변을 누가 더 잘 보는가로 다투는 사람도 없고, 세수를 누가 더 잘 하는가로 다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인 평화로운 마음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하는 활동 가운데에 어지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철직은 이것입니다.
"커지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당신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누군가 나를 밟고 올라서려고 하면 그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저 단순히 그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부부 사이에서 남편은 남편들끼리, 아내는 아내들끼리 모여서 하는 소리가, '절대로 상대에게 약점이나 빈틈을 보이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를 제압할 무언가를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근본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원칙은 '선 긋기'를 확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건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서 그를 공략하는 것입니다. 즉, 부부가 아니라 '적대자'를 위한 전술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 이런 말을 들으십시오. '상대를 믿고 모든 걸 드러내 보이세요. 심지어는 뒷통수를 치더라도 상대를 믿고 기다리고 껴안아 주세요. 설령 배우자가 끝까지 배신을 할지라도 당신은 하느님 앞에서 들어높여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런 걸 가르치는 하느님의 지혜를 지닌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는 전자의 이야기, 철두철미하게 상황을 파악해서 나 스스로 절대 상처받지 않고, 상대를 잘 공략하라라는 세상의 소리가 난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땅 안에서의 모든 것, 모든 관계, 모든 지위는 먼지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의 마음밭에 키워둔 것들이 진정 소중하게 여겨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 고로 가까이에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에게 감사 드리십시오. 그건 하느님께서 나의 나쁜 성질을 훈련시키기 위해 마련한 참으로 좋은 도구이니까요. 더군다나 그 사람이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라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로 인해서 당신은 보다 완전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어 많은 이들을 구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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