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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기

연중29주금요일

10개의 사탕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는 그 10개의 사탕이 자신이 가진 전부이기에 어떻게든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1개의 사탕이라도 훔쳐가려고 하면 자연스레 난리가 나게 됩니다. 그것은 '부당'하고 '불의'한 행동이며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영역이 됩니다.

하지만 10개의 사탕과 더불어 '착한 아버지'를 지닌 아이에게는 상황이 다릅니다. 아이는 '착한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고, 만일 내가 가진 걸 다른 아이들과 나누면 그 착한 아버지가 나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줄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기꺼이 가진 사탕을 나눌 수 있습니다. 달라는 아이에게도 주고,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큰 만큼 내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당신의 모든 것, 인성의 모든 영역을 내어 주셨습니다. 모욕과 박해, 수난과 죽음을 달게 받으셔서 아버지가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굉장히 영리하고 많은 것들을 헤아려내고야 맙니다. 어느 기업의 상태가 이러면 앞으로 어느 제품의 생산이 줄어들테니 자연 그쪽과 관련된 중소기업들이 타격을 받게 될거고 따라서...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잘도 읽어냅니다.

하지만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인지의 영역이 그저 우리가 사는 세상 뿐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그 인지의 영역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는지가 관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고 해서 모두가 '신앙'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관습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목적들(인간관계 등)을 마음 속에 숨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 중심으로 재배치합니다. 주일미사를 가는 것도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활동들도 사람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기 위한 나의 작은 노력들이 됩니다.

세상의 징조는 읽으면서 우리 자신의 구원의 길은 찾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 가장 먼저 갈구하게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심지어 나를 미워해서 죽이려고 드는 사람에게마저도 나를 내어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의지의 방향마저도 그 약함 때문에 바뀌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만이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약해 쓰러질 지언정, 우리의 사랑의 의지만큼은 타올라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는 그 마음, 다른 뺨을 돌려대려고 작정하는 그 마음 만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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