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마르코 복음 16장)
부활, 다시 살아남.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땅의 말마디로 풀어내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다.
하지만 누군가가 풀이해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알 것이며(이해)
어떻게 그 사건을 믿을 것인가?(신앙)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부활신앙'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다.
신앙은 결코 말마디'만'으로 전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삶'이 수반되어야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지금 나는 이 부활신앙을 말로써 어떻게든 풀이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여러분들이 진실로 이 말을 이해하게 되는 때는
결국 내가 지금 살고있는 부활신앙을 여러분들이 보고 또 여러분들이 직접 체험하게 되는 때이다.
영원을 위해 순간을 포기하고,
이를 통해 결국 순간을 완성하는 행위.
조금은 난해하지만 그것이 '부활신앙'이라는 것의 말풀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이 돌아가신 건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목격되었다.
그리고 성경은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 대해서 증언을 하고
천사가 알려준 소식을 전하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을 간단하게 전하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사명을 알리는 것으로 그친다.
그게 전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마르코 복음의 부활 묘사는 의외로 너무나 단촐해서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장은 이 성경의 마지막 부분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의 장은 교회의 20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증거되고 있으며,
결국 지금의 우리 각자의 생활을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새로운 성경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그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단순히 신자와 비신자로 가르려는 그런 단순한 시도는 그만두자.
참으로 어리석은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은 오직 '열매'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는 꾸준히 부활을 살아나가야 한다.
어느 한 사람에게 '당신은 부활의 신앙이 영원히 없을 것이요.'라고 단정지을 수 없고,
또 누구에게 '당신은 부활의 신앙을 확고히 지니고 있고 영원히 잃지 않을 것이요.'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늘 스스로의 부활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나아가 모든 이가 이 부활을 증거하도록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의 단죄, 그것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매를 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하느님은 매를 들 생각이 없으시다.
이 단죄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못된 마음을 먹은 아이가 가는 곳마다 못된 짓을 해서 결국 자기 스스로 가장 힘들어하는 것과 같다.
어지르기만 하는 아이가 어딜 가든지 난장판을 만들어서 결국 제 스스로 더럽혀지는 것과 같다.
자기의 마음만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순수해질 수 있음에도,
거짓에 거짓을 거듭하고 그렇게 스스로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오늘도 난 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 부활의 신앙을 전하고,
또 이렇게 인터넷으로도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으니,
오늘 밤도 평안할지어다. ㅎㅎㅎ
아, 배고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