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미사,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로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라파스를 가고 싶습니다.
어떻게 갈까 생각을 하다가,
결국 차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시동을 걸고, 백미러를 보고, 기어를 조작하고, 페달을 밟으면서
이리 저리 신경을 쓰고 운전을 하는데,
아뿔싸... 차가 라파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베니 쪽으로 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잘한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고 정작 방향을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애시당초 정해두었던 방향과는 전혀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뭔가 이러저러한 것들을 열심히 지키기는 하나
가장 근본 방향이 틀려버렸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서 가는 것일까요?
주일 미사를 지켜야 하고,
판공성사를 지켜야 하고,
금육, 단식, 공복재를 지키는 건 좋지만,
그 근본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걸까요?
외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는 두 사람이지만
내면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사람은 하느님께 새로운 하루를 주신 데에 감사를 드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과 오늘 하루 겪을 일들, 그리고 다가올 일들에
잔뜩 마음을 졸이며 불평을 가득 해대면서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면,
똑같은 '기상'이라는 활동을 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 머물게 됩니다.
법률을 잘 지키는 것이 '구원'으로 이끄는 게 아닙니다.
법률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잘 지킵니다.
나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반장'이
사실은 하느님의 일은 아무런 관심이 없고
실은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명예'를 바라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내는 '교리교사'가
사실은 아이들을 복음화 시키는 것보다는
주일마다 벌어지는 술자리판에 끼고 싶은 마음
교사들 놀이에나 따라다니는 것에 마음이 더 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방황은 누구나 하는 거지만,
결국 선택은 스스로 하는 겁니다.
꾸준한 주님의 조명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걸어나가지 못한다면,
결국 그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