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감각
1) 나 오늘 어머니에게 갈거야.
2) 저는 오늘 중으로 저의 어머니를 방문할 약속을 잡았습니다.
3) 본인은 금일에 모친을 방문할 예정에 있다는 걸을 고합니다.
이 세 문장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화자는 오늘 어머니를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세가지의 표현 방법이 모두 다르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대해야 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통해서는 그 원의를 깨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의를 확고하게 이해한 다음에는 이든 저든 그 원의를 더욱 다지는 데 도움을 주겠지만, 그 원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는 말마디 연구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적지않은 신학자들이 빠져있는 오류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적 지식은 많지만, 실제 삶에서 자신들이 대하고 있는 텍스트의 저자인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경의 구절구절은 빠삭하게 외우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를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은 '탐구'에 대한 욕구를 좀 덜어내고 사람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 이성으로는 천사들 근처에서 놀 수 있지만, 실제적인 삶은 '이성' 안에서의 놀이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반면 이런 학적인 것에 반감을 가지고, 생활로만 다가서겠노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니 이들 또한 길을 잘 잡아야 한다. 무조건 사람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리어 피폐해져 가는 경우도 있다. 마치 보좌 신부가 청년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놀이문화를 배워야 한다며 늘상 술자리에만 돌아 다니다가 결국엔 거기에 흠뻑 빠져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이들은 조용한 방에 자리잡고 앉아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균형감각'이라는 것은 그래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부딪히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신다. 이 하느님의 원의를 잃은 채로, 법규나 말마디 논쟁에만 집중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만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본래의 길에서 점점 더 멀어져만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