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상실한 시대
곤충 하나를 가져다놓고, 그 부위별로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한다. 더듬이, 머리, 몸통, 다리를 모조리 일일이 떼어낸 뒤에 면밀하게 면밀하게 조사에 조사를 거듭한 다음에 다시 원래의 위치대로 접합하기 시작한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모조리 원래 상태로 돌려 놓았다. 우리는 곤충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곤충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생명'이다.
과학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과학'을 신봉한다. 사물들을 직접 만지고 연구하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면밀히 면밀히 조사하여 거의 모든 걸 다 알게 된 듯 싶다.(물론, 식견있는 과학자들은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잃어버린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인 창조주 '하느님'이다.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인데도 사람들은 부분 부분을 뜯어발겨서 자세히 알아본 뒤에 '하느님은 없다'고 한다. 우주를 살펴봐도, 원소 안을 뒤져봐도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이들로 내몰기 시작한다. 기계의 수명이 80년 정도에 불과하니 그 안에서 할 만한 것들은 다 하고 누릴 만한 것들은 다 누려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게 아니고 창조주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고 서로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눌 줄 알아야 된다 하니, 그래, 적잖이 거슬린다.
때로는 심지어 '신학' 안에서조차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의 부분 부분을 면밀히 조사해서 나아가는 통에 정작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알아듣기 힘든 '이론'들만이 잔뜩 쌓이게 되었다. 신학대학 도서관에 '하느님'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신앙은 '책' 속에 머물지 않는다.
특정한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움직임이 보인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일들이 그 일들 자체가 소중하게 된다. 하다못해 지금 내가 머무는 본당만 해도 그렇다. '작년에 했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올해도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주 잠깐 사이에 하느님을 잊기 쉬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웹서핑 몇 번만 하면서 인터넷 기사나 광고를 보다보면, 그 세상의 이끔에 어느새 따라가 버리고 만다. 텔레비전은 얼마나 화려한지 대사 하나하나 자막 하나하나까지 달아주면서 내가 해야 할 생각을 대신해준다. 예전 유머 일번지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개그를 보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어야 할 때에 웃음소리까지 틀어준다.
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다. 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나 자신의 본질에만 집중해도 하느님을 향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침묵과 겸손과 기도의 시기가 도래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서 2장 12-13절>
곤충 하나를 가져다놓고, 그 부위별로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한다. 더듬이, 머리, 몸통, 다리를 모조리 일일이 떼어낸 뒤에 면밀하게 면밀하게 조사에 조사를 거듭한 다음에 다시 원래의 위치대로 접합하기 시작한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모조리 원래 상태로 돌려 놓았다. 우리는 곤충의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고 자신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곤충이 원래 지니고 있던 '생명'이다.
과학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이들이 '과학'을 신봉한다. 사물들을 직접 만지고 연구하면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면밀히 면밀히 조사하여 거의 모든 걸 다 알게 된 듯 싶다.(물론, 식견있는 과학자들은 오히려 더 모르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잃어버린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생명인 창조주 '하느님'이다.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움직이는 원동력인데도 사람들은 부분 부분을 뜯어발겨서 자세히 알아본 뒤에 '하느님은 없다'고 한다. 우주를 살펴봐도, 원소 안을 뒤져봐도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앙인들을 어리석은 이들로 내몰기 시작한다. 기계의 수명이 80년 정도에 불과하니 그 안에서 할 만한 것들은 다 하고 누릴 만한 것들은 다 누려야 하는데, 신앙인들은 그게 아니고 창조주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고 서로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눌 줄 알아야 된다 하니, 그래, 적잖이 거슬린다.
때로는 심지어 '신학' 안에서조차 이런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의 부분 부분을 면밀히 조사해서 나아가는 통에 정작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알아듣기 힘든 '이론'들만이 잔뜩 쌓이게 되었다. 신학대학 도서관에 '하느님'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진짜 신앙은 '책' 속에 머물지 않는다.
특정한 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움직임이 보인다. 하느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일들이 그 일들 자체가 소중하게 된다. 하다못해 지금 내가 머무는 본당만 해도 그렇다. '작년에 했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올해도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아주 잠깐 사이에 하느님을 잊기 쉬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웹서핑 몇 번만 하면서 인터넷 기사나 광고를 보다보면, 그 세상의 이끔에 어느새 따라가 버리고 만다. 텔레비전은 얼마나 화려한지 대사 하나하나 자막 하나하나까지 달아주면서 내가 해야 할 생각을 대신해준다. 예전 유머 일번지는 그래도 양반이었다. 개그를 보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어야 할 때에 웃음소리까지 틀어준다.
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다. 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나 자신의 본질에만 집중해도 하느님을 향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침묵과 겸손과 기도의 시기가 도래했다.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돌아오너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서 2장 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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