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어디에서 나올까?
1) 육체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욕구에 대한 나의 부주의나 소홀함에서 나온다.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픈 것도 고통이고,
제때에 소변을 보지 않아 방광이 저린 것도 여기에 해당하는 고통이다.
제때 제때 해소하면 될 것을, 부주의하거나 소홀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담배를 많이 피면 필시 폐나 기타 장기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술을 지나치게 즐겨도 마찬가지이다.
단걸 많이 먹거나, 기름기 있는 음식도 그렇다.
칼에 손을 베거나, 길을 걸어가다가 부주의하여 넘어지거나, 운전을 소홀히 하다가 부주의해도 그렇다.
이렇게 뭔가를 소홀히 챙기거나 부주의한 경우에 육체적 고통이 뒤따른다.
그게 아니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장기의 설명할 수 없는 손상들은,
주로 정신적인 고통의 부산물들이다.
우리의 호르몬 시스템이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해당하는
그릇된 물질들(당장은 스트레스에서 몸을 보호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이 장기화되면서
몸 속에 축적되어 그릇된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욕구를 채우거나, 치료를 하거나, 나을 때까지 참아내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죽을 때까지...
2) 정신적인 고통
내가 신경을 쓰는 것에서 나온다.
누군가 옆에서 꾸준히 욕을 한다고 하자.
이는 필시 육체적인 고통, 즉 나의 뉴런을 통해 신경들을 거쳐 뇌로 바로 도달하는 고통은 아니다.
좋은 해결책은 '신경을 끄는 것'이다.
아니면 자꾸 연마를 해서 거기에 대해서 무신경하게 되는 것이다.
욕쟁이 할매 가게에 가면 처음엔 기분이 나쁘지만,
어느새 무뎌져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싫은 게 있으면 자꾸 들으면 된다.
예를 들어 난 군대에서 싫은 선임병이 좋아서 자꾸 트는 음악을,
나 스스로도 더 들어서는 그냥 내가 좋아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는 사람도 그렇고,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그렇다.
아예 신경을 끄던지, 직접 부딪혀서 무디게 만들면 된다.
무엇보다도 내면의 기반이 튼튼한 사람은,
이런 정신적인 고통 쯤은 별거 아니다.
3) 영적인 고통
이건 일반인들로서는 도무지 잘 감도 오지 않는 고통이다.
이는 성인들이 가끔씩 표현하는 것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 혹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웃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물론 그 밖에 어떤 고통들이 구체적으로 더 있을지는 나도 상상할 수 없다.
이 고통은 하느님께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메꾸어질 수 있다.
'기도, 단식, 자선'과 같은 종류의 활동들로
자신의 영적인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도 부단히 기도하셨다.
물론 자기 자신보다는,
주로 이웃의 영적인 멀어짐을 위해 기도하셨겠지...
하지만 수난 전날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는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당신 앞에 오는 잔이 멀어지기를 얼마나 기도하셨겠는가?
이 영적인 고통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웃을 통해서 이 고통을 느끼는 자는,
제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말씀을 전하러 나간다.
이처럼 이웃을 통해 고통을 느끼는 이의 고통해소법은 '선교'이다.
이러한 종류의 영적인 고통을 느낀다면,
당신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영적 고통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이겨 나갔으면 좋겠다.
끝으로 하나 추가하자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은 도리어 영적 즐거움으로 승화되는 경우도 많다.
그저 육체적 정신적 차원의 고통을 그 자체의 즐거움으로 느낀다면,
새디스트이고 마조키스트일 뿐이지만,
이 두 차원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