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운동
많은 '신심운동'들이 존재한다. 레지오, 성령기도회, 젠, 다락방, 파스카 청년 성서모임 등등... 일상 안에서 신심을 도모하기 위해서 각자의 카리스마대로 다양하게 나온 것들이다. 이 신심운동들은 무엇보다도 "일상 안에서의 신앙의 생활화"가 그 궁극 목적이다. 그저 내공만 잔뜩 쌓아서 저 혼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은 내공으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과 맞닥뜨리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신심운동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이들은 굳이 따로 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삶으로 잘 녹여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신심운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반상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자기들만 아는 어떤 것들을 비밀스레 공유하는 특권계층의 자부심이랄까? 자기들만이 아는 코드로 다른 이들을 오히려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떤 그룹이든지 덩치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 '그룹의 생존'에 대한 욕구이다. 사실 '신심(믿는 마음)'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내세울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 말고는 그 어떤 특별 계층의 그룹도 '따로' 만드신 적이 없다. 모든 그룹들은 네트워크처럼 상호간의 발전을 위해서 연결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할 때에 필요한 도구를 필요한 만큼 쓰고는 다른 도구가 필요할 때에는 기존에 쓰던 것을 손에서 놓는 것이 정상이다. 조각상을 만드는데 사포로 갈아야 할 때가 왔는데 아직도 망치를 들고 다듬으려고 든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히 사랑하는 일이지 그 어떤 신심활동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내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년 레지오를 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젠에 참여할 때가 있고, 시간이 흘러 청년 파스카나 그 밖의 활동들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걸 유지시키기 위해서 나 스스로 허덕이고 있다면 그 고인 물은 필시 썩게 마련이다. 이는 교리교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청년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이가 마땅히 이어나갈 환경이 아니라서 내가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지만, 내가 있음으로 해서 후배가 마땅히 체험하고 성장해야 할 자리를 꿰어차고 있다면 그건 필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교사회장은 평교사로 돌아가야 하고, 청년 회장도 평회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늘 하느님을 향해 같은 순례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백성 안에서 필요에 의해서 이런 저런 새로운 소모임들이 생겨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마냥 절대시하기만 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으면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신심운동'들이 존재한다. 레지오, 성령기도회, 젠, 다락방, 파스카 청년 성서모임 등등... 일상 안에서 신심을 도모하기 위해서 각자의 카리스마대로 다양하게 나온 것들이다. 이 신심운동들은 무엇보다도 "일상 안에서의 신앙의 생활화"가 그 궁극 목적이다. 그저 내공만 잔뜩 쌓아서 저 혼자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쌓은 내공으로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과 맞닥뜨리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신심운동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이들은 굳이 따로 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삶으로 잘 녹여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신심운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들끼리의 반상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자기들만 아는 어떤 것들을 비밀스레 공유하는 특권계층의 자부심이랄까? 자기들만이 아는 코드로 다른 이들을 오히려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떤 그룹이든지 덩치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 '그룹의 생존'에 대한 욕구이다. 사실 '신심(믿는 마음)'이라는 말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내세울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그분 안에서 우리들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인 교회 말고는 그 어떤 특별 계층의 그룹도 '따로' 만드신 적이 없다. 모든 그룹들은 네트워크처럼 상호간의 발전을 위해서 연결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작업을 할 때에 필요한 도구를 필요한 만큼 쓰고는 다른 도구가 필요할 때에는 기존에 쓰던 것을 손에서 놓는 것이 정상이다. 조각상을 만드는데 사포로 갈아야 할 때가 왔는데 아직도 망치를 들고 다듬으려고 든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히 사랑하는 일이지 그 어떤 신심활동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내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년 레지오를 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젠에 참여할 때가 있고, 시간이 흘러 청년 파스카나 그 밖의 활동들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걸 유지시키기 위해서 나 스스로 허덕이고 있다면 그 고인 물은 필시 썩게 마련이다. 이는 교리교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청년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이가 마땅히 이어나갈 환경이 아니라서 내가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지만, 내가 있음으로 해서 후배가 마땅히 체험하고 성장해야 할 자리를 꿰어차고 있다면 그건 필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교사회장은 평교사로 돌아가야 하고, 청년 회장도 평회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늘 하느님을 향해 같은 순례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백성 안에서 필요에 의해서 이런 저런 새로운 소모임들이 생겨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마냥 절대시하기만 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으면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에게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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