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외모가 서로 다르듯이 인간의 내면도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외모에 대해서 우리가 서양 사람인지 동양 사람인지, 피부가 검은 사람인지 흰 사람인지를 분별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도 비슷한 유형을 나누어 볼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여러가지 것들이 인간의 성격 유형을 검사하는 여러 지표들입니다.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알아두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일이나 대인관계에 있어서 더 수월하거나 혹은 더 힘들거나 하는 것을 나의 내면을 미리 파악함으로써 적절히 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때로는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자신의 성격 유형으로 인해서 바로 ‘자유의지의 영역’이 뒤덮여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성격이 원래 강해서 그런 것이니 내가 타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것은 내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성격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엄연히 존재하고, 이는 심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랑과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격 유형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성격이 내성적이라고 해서 늘 방 안에만 있으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 성격이 외향적이라고 해서 늘 그것을 좋게만 쓰라는 법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뚜렷이 드러나는 성격 유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성격을 주관하는 내면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격 유형 검사로 인해서 사람들은 이를 그릇되이 이해하는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내성적인 사람이 저지르는 악은 분명한 악이고 반대로 내성적인 사람이 이루는 선은 분명한 선입니다. 그것은 성격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지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격 유형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뉘우치고 돌아서야 할 영적인 수치감을 ‘성격으로 인해서 그렇다는 변명’을 둘러대어 버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세상의 도구들은 제 나름의 합당한 목적으로 쓰여질 때에는 좋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칼을 들고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듯이 그것을 가지고 엉뚱한 영역을 침해하기 시작할 때에 그 도구는 다른 이들을 해칠 수도 있는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분별력 있게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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