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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용서와 불가능한 용서의 차이



용서하기 힘들다 - 용서를 하려고는 하나 내면에 쌓인 앙금이 많아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

용서하지 않겠다 - 그 어떤 가능성 이전에 이미 나의 의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비록 외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은 유사하겠지만 이 둘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용서는 사랑이 완성되어 갈 때에 드러나는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외적으로 뚜렷이 존재하는 어떤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서서히 이루어 나가는 우리의 내적 의지의 결과물이지요.

그래서 용서라는 것은 당연히 서서히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축적되어 가는 만큼 용서도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처음부터 용서를 시원하게 그리고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을 깎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배워 알게 되고, 그분의 외아드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용서라는 것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큰 용서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용서도 시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용서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서서히 수많은 인고의 노력을 통해서 나의 내면에서부터 서서히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힘든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용서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훗날 하느님에게 용서를 갈구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선을 쏟아 넣어 주시려고 해도 그 통로를 우리 스스로가 막아 버린다면 우리 안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무너지게 마련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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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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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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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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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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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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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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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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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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