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1요한 1,6)
빛이신 분과 친교를 나누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그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빛을 의미하며 우리가 알기 쉬운 표현으로는 양심의 맑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살아가는 이는 영혼이 맑아야 하며 그 안에 어두움이 끼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어떤 오류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곧잘 과거의 죄책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죄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과거의 어두움을 맡겨 드려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합당하게 준비한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앞에 나의 과거의 어두움을 뉘우치고 고백하고 치유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의 어두운 인연을 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부터는 현재를 분별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로부터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동안 다시 쓰러질 것이고 또다른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하느님에게 되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이 의지적인 노력이 바로 우리를 점차적으로 완성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죄책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으며, 또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현재를 선으로 메꿀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엇나간 마음은 언제나 ‘이기적’인 수단과 방법을 찾으려고 하고 이는 우리를 선으로 이끌기는 커녕 더한 악으로 언제나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은총도 선도 모두 하느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알아서 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그 선에로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지만 그 수도꼭지를 찾아서 나의 목마른 몸을 옮겨가는 일은 바로 내가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 하고 꾸준히 어둠을 거부하면서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여전히 우리의 삶은 어둠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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