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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세상에 자기 혼자만 완벽하게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행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오류가 있고 미흡함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들이 서로 부딪히게 되는 것이지요.

차량에는 ‘완충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로의 왠만한 요철은 크게 미동이 느껴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도 ‘완충장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작은 미동은 크게 느껴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완충장치가 훌륭하게 갖추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아주 초라한 모양새를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성마른 사람’, 혹은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고 부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완충장치가 잘 갖추어져 있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스프링도 때가 되면 닳게 마련이고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피로도’가 증가하게 되고 결국 관계가 파괴되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일을 미연에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신앙’이라는 특별한 장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지상적인 차원에서 천상적인 차원으로 들어높여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우리에게 참된 지혜를 전해줍니다. 그 지혜는 우리에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우리를 참된 방향으로 이끌어주지요.

물론 보다 구체적인 사안들 안에서 때로 우리는 움직여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형제의 오류를 조용히 다가서서 충고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가 닿기 전에 우리는 이미 ‘험담’이라는 것을 통해서 일을 더욱 키우게 마련이지요.

문제가 커져서 장상의 귀에 들어가게 될 때는 사실 많은 오류들이 지뢰처럼 터지고 난 뒤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겸손할 줄 알았더라면, 그리고 하느님에게 의탁할 줄 알았더라면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충돌들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간성은 지극히 인간적인 ‘정의’를 부르짖으며 증오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주장하곤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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