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22)
공자가 한 이야기 중에 다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그것만으로 좋지 않다.”
“마을 사람이 모두 싫어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말했다. “그것도 좋지 않다. 마을의 착한 사람이 좋아하고 악한 사람이 싫어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646회. 331논어, 자로24)
헌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술 더 떠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덕을 벗어난 초자연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인간은 ‘생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헌데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죽을 작정을 하고 나서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 첫 테이프를 끊으신 셈이지요. 예루살렘에 가면 그분의 적대자들이 득실거리는데도 예수님은 그리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스스로 내어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성애에 사로잡힌 어머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헌데 예수님이 자신을 내어바친 대상은 살릴 만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의 크기는 우리가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큰 사랑의 근원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는 함부로 상상할 수 없는 차원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이라는 선물이었지요.
그 영원에 사로잡힌 이들이 순교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머나먼 선교지에서 일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 학대와 폭정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죽는 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기회는 좀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일상 안에서의 죽음을 체험합니다. 정말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작은 일이지만 그 안에 신앙의 선택과 우리 육신의 이끌림 사이에서 주저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체험합니다. 남편에게 한 번 신나게 쏘아주고 싶은 것을 참는다거나, 은근히 성질을 돋우는 자녀들을 다시 한 번 참아 주는 것과 같은 아주 작은 행동이 바로 우리의 순교의 자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재미없다고 할 것이고 우리와 머무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성가심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내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며 일찍이 예정되어 있던 하느님의 자녀들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참고 견디는 이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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