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미사를 봉헌하면서 기다리는 것, 또 레지오 회합때마다 사제의 강복을 통해서 받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이 은총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 그리고 영적인 힘을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그 힘은 참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능력은 동물들의 능력에 비하면 보잘 것 없습니다. 심지어 개미조차 자신의 몸무게에 몇십배나 되는 물건을 움직이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만한 능력이 없고 심지어는 외피에도 충분한 털이 없어서 조금만 춥거나 더워도 문제가 생깁니다. 정신적인 능력도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질병 가운데 심리적인 질병은 적지 않은 영역을 차지합니다. 나아가 영적인 능력, 즉 사랑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부족하지요.
은총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남김없이 채워줄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이 현세 안에서 우리의 능력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은총에 힘입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헌데 성모님께서는 이 은총이 가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조력이,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을 채우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 사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렇게 되라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은총의 사명에 ‘네’라고 수긍하셨고 그 은총을 받아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하셨으며 나아가 우리에게 그 은총을 나누어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 우리가 묵주알을 굴릴 때, 바로 성모님께서 받으신 그 은총이 우리에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한 이들입니다. 이번 한 주간, 특별히 시간을 내어 고요한 가운데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는 시간 마련하시길 바랍니다.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인간은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다른 말로는 ‘행복’이라고 하지요.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든 일들을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기준이 저마다 달라서 추구하는 것도 저마다 달라지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행복의 근거가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모든 활동을 이어 나갑니다. 또다른 이에게는 행복의 근거가 재산의 증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듭니다. 그 밖에도 권력이 행복의 근거인 사람, 미모가 행복의 근거인 사람 등등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방향으로 열심히 나아갑니다.
성모님의 행복의 근거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지요. 성모님에게는 다른 행복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도, 아무리 많은 명예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다음에는 의미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성모님은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을 잃더라도 세상적 요소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당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통해서 신앙을 가장 먼저 버리는 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신부님에게 실망해서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빠지고, 공동체 구성원에게 실망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없었더라면 신앙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는 완벽한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 모여들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분의 사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체적인 현실은 늘 불완전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부족함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었고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언제나 이해하지 못할 일이 일어나면 성모님은 깊이 숙고하시고 하느님에게 의탁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기쁨의 근거를 올바로 살피고 다시 하느님을 찾는 계기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복되다는 것, 축복이 가득하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그 ‘복됨’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학벌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복된 사람은 좋은 대학에 자녀를 들여보내는 사람이 복된 사람을 취급 받을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가 열심인 곳에서는 싼값에 알짜땅을 구입한 사람이 복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과연 어떤 근거로 축복 받으신 것일까요?
성모님은 태중에 모신 아드님으로 인해서 그 복을 얻습니다. 성모님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목적이었고 외아들의 잉태로 자기 자신과 이스라엘과 구원자를 기다리는 모든 세상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복되신 분이 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일화를 전합니다. 어느 여인이 “선생님을 배엇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대꾸하십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성모님의 복되심에 반대하신다고 추측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모님이야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가운데 예수님을 잉태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모님의 생은 세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다지 복되지 않습니다. 처녀이면서 임신을 해서 파혼의 위기를 겪기도 했고, 예수님을 낳고서는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이집트로 이민 생활을 가셔야 했습니다. 성전에서 아이를 잃어서 사흘 밤낮을 찾아 다닌 적도 있고 또 최종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계획이 있었고 성모님은 그 하느님의 뜻에 충실함으로써 축복을 얻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여왕이 되셨지요. 성모님의 복됨은 이 지상의 짧은 생을 넘어서 영원 안에서 찬란히 빛나시는 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복되신 성모님을 찬송하며 우리 역시도 그것을 나누어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영광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도록 이번 한 주간 동안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모님께서 받으신 특별한 은총은 이 지상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은총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이들의 어머니로 격상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상생활 동안 은총의 그릇으로 선별되어 가득히 받으신 은총을 영원 안에서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성덕이 있는 이들이 마련한 공덕이 그것이 부족하거나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진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천상 교회는 지상 교회를 도울 수 있고, 지상 교회는 연옥 교회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을 나눌 수 있는 성인들 가운데 가장 으뜸이신 분, 가장 사랑이 가득하신 분, 바로 상경지례를 받으시는 어머니 마리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자녀들이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시고 또한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신비입니다. 산 사람 중에는 죽음을 체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유일하신 분, 하느님의 외아드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것이 부활에 가 닿게 하는 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죽음이 불안의 요소로 작용을 합니다. 그만큼 외아드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의 도움은 바로 거룩하신 어머니, 즉 성모님의 기도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믿음의 모범을 지니신 분이기에 우리의 불안한 믿음을 굳건히 세워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약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나약한 줄을 알면서도 의탁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번 한 주간, 성모님의 기도에 우리를 내어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머니께서 분명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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