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신자분들은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제'를 꼽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잘 대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만일 한 부자 신자가 자신과 함께 호화로운 술자리를 즐겨주고 같이 골프회동에 동참해주고 자신의 사업에 충분히 이득이 될 만한 좋은 말말 해주는 사제를 원한다면 그 사제는 그렇게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좋은 사제라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사제라는 단순한 개념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사제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사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여정으로 초대하지만, 때로는 정 반대의 길을 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들의 박해를 각오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사제,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걷는 이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제, 때로는 그들의 박해를 각오하면서도 진정한 길을 가리킬 줄 아는 사제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굳이 사제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제 갈 길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자신의 삶에 구현해 내고 있다면 사제의 기능은 오직 '성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으로 국한될 것입니다. 헌데 때로 우리 교회의 실상을 보면 이미 교회가 마치 완성되기라도 한 듯이 이런 기능적 역할에만 충실한 모습입니다.
아직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신앙 안에서 모범과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제는 단순한 행정관이나 성사 집행관이 아닙니다. 사제는 우리의 공통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사제가 되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착한 듯 보이지만 실제 부딪혀보면 저마다의 오류와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기 시작하면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박해를 각오하는 사제가 되어야 합니다. 순탄한 여정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상급은 이 지상에서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상급은 영원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이 길을 충실히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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