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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와 과도함 사이에서



건물을 키우고 싶은 사람은 건물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반면 영혼을 성장시키고 싶은 사람은 영혼을 성장시킬 능력이 있는 분에게 잘 보여야 합니다. 이 차이가 서로 다른 성향의 두 지도자를 만들어 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아한 성당'을 짓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갑니다. 여기에 혼돈이 존재합니다. 멋진 성당을 짓는다고 신앙이 절로 자라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 둘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버립니다. 자칫 성당을 화려하게 짓는 것이 좋은 신앙을 드러내는 듯이 가르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많은 봉헌금을 내는 것이 곧 열심한 신앙을 증거한다는 듯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런 열심한 신앙이 재산의 축복을 불러온다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 아무것도 없이, 한 푼도 없이 살 수 있느냐?'


아니오. 그렇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복음을 듣는 양들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아름다운 봉헌 예물이 될 것입니다. 비와 바람을 막기 위한 필수적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화려함이 담긴 과도한 건축물을 변명하기 위해서 돈의 필요를 과장해서 말하는 것도 오류입니다. 우리는 금전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한 필요에 따른 것이 있고 우리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내면이 부실한 사람은 언제나 외면으로 그것을 메꾸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존감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소박하고 단정하게 꾸미고 삽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화려함은 피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목매다는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데에 애를 씁니다. 내면을 챙기는 이, 영혼을 키우고자 하는 이가 많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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