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스승은 그냥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제자가 있을 때에 좋은 스승도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전해주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이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꽤나 저와 오랜 시간을 머문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지요. 반면 아주 가끔 마주치는데도 저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만남의 실질적인 '시간'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수압이 세면 짧은 시간이라도 충분히 많은 물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해주려는 이와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이 만나면 적은 시간이라도 많은 가르침이 건너갑니다. 많은 걸 들어서 배운 게 아닙니다. 아는 걸 실천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은 고작 성경 몇 구절 밖에 외우지 못했지만 그것을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아 실천하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드높은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수많은 '수도회' 들의 저마다의 모토 역시도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영성의 '가난'이나 베네딕도회의 '기도와 노동' 처럼 정작 그들의 핵심 영성은 단어 몇 개로 추려집니다. 남은 것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실현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까요? 오늘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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