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인내



그리스도교의 덕으로서 '인내'에 대해서 서술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왜 참아야 하는지 등등에 관해서 생각이 가 닿는 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1) 인내는 다른 덕의 밑바탕이다.

인내는 가장 기초적인 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텃밭에서 다른 모든 덕들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인내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우선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장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인내가 기본되어 있지 않으면서 다른 덕이 자라나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다른 덕이 살짝 뿌리를 내린다 하더라도 곧 그 덕에 반대되는 시련이 다가올 때에 인내의 부족으로 덕행의 씨앗이 말라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2) 무엇을 참아야 하는가?

인내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불편을 참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인내는 성장합니다. 나아가 다른 이의 어리석음도 참아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누군가의 공공연한 죄악도 일단은 인내와 더불어 살펴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덕이 우선하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린 꼬마 아이를 사정없이 때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일단은 내가 참아야지' 하면서 쳐다보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이를 폭력에서 구해 내는 것이 우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런 특별한 일은 잘 벌어지지 않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일을 대상으로 '인내'를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다른 덕(분별, 정의, 용기 등)을 실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3) 왜 참아야 하는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인내는 덕이며 참는 것이 나에게 득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인내를 통해서 다른 이에게 기회를 선물해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인내 안에서 그분의 정의와 그분의 질서에 동참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인내 그 자체이십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아도 만일 하느님이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지금의 상태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을 뻔합니다. 죄를 짓는 즉시 하느님이 참지 않으시고 벌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 뻔합니다. 그런 하느님의 인내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하고 하느님이 이루실 정의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심판은 모든 정황을 올바로 보는 이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오직 하느님께서 올바로 심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서서 정의를 실행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겠지만 우리의 분별은 언제나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법정에서 오랜 심리를 거쳐 판단한 사형수의 무결함이 훗날 밝혀지는 일도 적잖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인내를 훈련해야 합니다.


4) 어떻게 참을 것인가?

'무조건 참아야 한다'가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앞서 매맞는 아이의 예를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분별'과 더불어 참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정말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인내를 우선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 속에서 특징적인 면은 인간은 '참지 않으려고' 많은 문명을 발달시켜왔다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사소한 영역에서조차 참지 못합니다. 배송이 늦어져도 참지 못하고, 매일같이 이용하는 시설에 조금만 불편이 생겨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도 곧잘 틀어지고 싸우는 일이 잦고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도 당장 뜯어 고쳐보려는 욕구에 시달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일상의 모든 영역부터 시작해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인내를 훈련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5) 각자의 약점을 찾아라.

사람들은 저마다 '인내의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돈이 없는 건 참겠는데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구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밥을 굶는 건 참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제외되는 걸 못참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살펴서 나의 인내의 어느 부분이 약한지를 살피고 그 지점을 본격적으로 인내해 볼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도성의 여러부분에 세워진 벽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을 점검하고 그 부분을 보강하는 것과 같고 몸의 여러 부분 가운데 특히나 약한 부분을 본격적으로 훈련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의외로 우리의 일상의 영역 가운데에서 마주하기 쉽습니다. 즉 대외적으로 다가오는 프로젝트의 힘겨움은 참지만 정작 가족 내에서 배우자나 자녀의 결함은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느님은 오묘하게도 우리의 인내를 훈련하고자 그런 이들을 우리 가까이 두십니다.


5)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가?

세상 사람들도 저마다 인내를 나름 훈련합니다. 고3 수험생들은 대학에 가기까지 열심히 공부하면서 인내를 키워 나가지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고등학교 수험생활의 인내를 더이상은 키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대학생활에서도 인내의 장이 시작되지만 이전 단계에서는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훈련하는 '인내의 덕'의 기간은 '평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지상생활 자체를 하나의 학교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내의 최종 산물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내의 시간은 '평생'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6) 인내의 기쁨

지금까지 서술한 것을 바탕으로 인내는 마냥 괴롭고 힘들고 끝없는 고난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엔가 지상 생활에서부터 우리의 인내가 그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즉, 인내를 훈련하지 않은 이들이 겪게 되는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져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남편과 아이를 견디지 못해 이혼을 한 사람이 훗날 겪게 되는 무질서와 공허를 바라보면서 참고 견뎌오면서 인내를 키워온 자신에 대한 재발견을 할 수도 있고, 순간적인 쾌락에 넘어가지 않고 인내로이 유혹을 견뎌 온 자신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인내 없이 쾌락에 빠져든 이의 처참한 결과를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조군에서 오는 기쁨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 서서히 더 개발되는 그 자체의 기쁨이 만만치 않습니다.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에서 직시할 수 있는 기쁨인 셈입니다. 즉 과거의 나 자신의 초라하고 격정적이며 변덕스러운 모습에서 오랜 기간 인내를 훈련해 온 지금의 나의 안정되고 평화롭고 어떤 어려움에도 대비되어 있는 모습을 되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7) 믿음과 인내, 인내와 희망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로마 5,2-4)

세상 사람들도 지닌 기초적인 인내와 달리,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인내를 시작합니다. 믿음과 더불어 시작된 인내의 자연스런 결과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인내는 더 잘 믿게 도와주고 더 잘 희망하게 도와줍니다. 인내는 단순한 지상적 차원의 참아 견딤이 아닌 천상적 차원의 덕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부로부터 창조되어 성자에게서 드러나며 성령과 더불어 실천되는 '인내'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내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헬스장의 운동하는 사람들도 인내를 지니고 있고 시장통에 물건을 파는 이들도 인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인내는 지상의 결실에 희망을 둔 인내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둔 인내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