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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경험과 초월

오직 '초월'을 경험한 사람만이 한계를 벗어날 꿈을 꿀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비슷비슷한 경험 속에서 살아간다. 비슷한 시대를 살면서 탄생하고 동시대의 물질문명의 혜택 속에서 비슷한 체험을 나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경험을 어른들을 통해서 듣게 되고 또 미처 우리가 생각지 못한 것을 발명해내는 후대의 세대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을 공유하고 최신 개발된 물건과 또 앞으로 이루어질 발전상을 유투브 영상으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경험들은 유사한 범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최신 기술을 뽐내고 문명의 발달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이 진정 '초월'을 이루어 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설령 영원히 사는 약을 발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 '초월'의 진정한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을 뛰어넘은 존재의 인도가 필요하다. 그런 초월적 체험이야말로 인간을 자신이 머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누구도 뛰어보지 못한 점프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신앙은 그것을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부활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정도로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미사와 성사 안에서 끊임없이 외쳐지는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해도 그 본연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세속적 부활에 대한 관념만을 얻을 뿐이다. 진짜 부활은 그 부활의 올바른 아이디어가 나로 인해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선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천할 때에 사람은 진정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를 더욱 상승세로 전환하게 된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일상의 예를 비유로 들어 보겠다. 한 아이가 그림을 그린다. 이...

6.25 - 아직도 갈라져 있는 우리

솔직히 들은 이야기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저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유산을 상속받은 셈인 나로서는 이 사회의 주된 사조를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하나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곳에서 가르쳐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의 소위 나쁜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순진했다. 고만고만한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저 가족이나 부양하고 입에 먹을 것 떨어지지 않는 정도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소위 위에 앉아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상, 저런 사상이 중요하고 상대의 사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전쟁을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싸우는 이들은 정작 그런 사상들이 뭔지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나 역시도 그냥 그 나이 되면 군대에 가야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알고 있었고 군대에 갔을 뿐이다. 군대에 갔으니 가르쳐주는 군대의 기술을 열심히 익혔을 뿐이고 복무 기간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뿐이다. 휴전이라는 교착 상태는 이런 식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이들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요소다. 우리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에 대한 기억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더 흐릿해져 갈 것이다. 물론 역사책 안에 남아 꾸준히 가르쳐지겠지만 세대가 거듭할수록 전쟁의 참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지금의 어르신 세대부터 일제시대의 참혹한 역사를 직접 체험한 분들은 서서히 세상을 떠나가고 없다. 누가 고구려 시대의 위기감을 기억하겠는가? 역사란 그런 것이다. 흘러가면 서서히 감각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전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를 직접 겪지 않는 다음에는 그 위기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본당이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역할과 입지를 여러가지 의미로 형성해 왔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었고 아직도 몇몇 나라에서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일상 생활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활동을 교회에 오면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또 교회에서 받는 인정이 곧 세상에서도 그 가치를 지닐 정도로 교회가 세상의 생활 속에서도 나름 중심이 된 위치였던 것이지요. 여전히 남미의 교회는 이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이 소박하고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열심히 활동하고 인정받는 사회성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어떨까요? 한국에서도 한때 그러한 시기가 존재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고 인정받던 시기였지요. 교회의 부흥기였고 교회의 활동이 어마어마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가족 구성원 전원이 교회에 와서 뭐라도 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살다시피 했지요.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엄마는 자모회에 아빠는 레지오 단원들과 주일이면 성당이 바글바글할 정도로 모여들어 시간을 보내며 활기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적으로도 시기적으로도 여러가지 상황에 따라서 변화를 겪지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발전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굳이 무언가를 찾지 않아도 세상에서 비슷한 활동들을 왕성하게 하고 그것이 하나의 직업군을 형성해서 그것으로 돈을 벌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남들이 감히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열심히 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 나은 아이템을 찾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끌어모으는 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그 반향으로 교회가 지금까지 해 오던 활동들이 지지부진하고 재미가 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교회의 기본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잘 관찰하고 그 본질적 활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영역에서 절대로 메꾸어 줄 수 없는 교회만의 고유한 활동...

편안한 신앙

두 단어가 어떻게 보이시는지요? 서로 어울리나요? 아니면 붙어있기가 껄끄러운 단어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추구하는 방향은 분명 우리가 지금 있는 상태로 '안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소개되고 다가와서 우리를 일으키고 움직이게 하는지에 있어서는 '부드러움' 혹은 '온유함'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편안한 신앙'을 이야기할 때, 혹은 다른 표현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때에 언급되는 그 편안함은 그 어떤 성장도 거부하는 상태, '나태'와 가까운 상태를 의미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학업을 거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며 매일같이 몸을 상하게 하지만 자신의 입맛에 맛깔스런 해로운 음식을 먹고 머릿속을 텅텅 비우는 모양새와 비슷합니다. 그럴 때에 '편안한 신앙'은 독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우리를 '희망'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지 않은 무엇입니다.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은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달음질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여러분도 힘껏 달려서 상을 받도록 하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우리는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1코린 9,24-25)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보면 어...

그저 기도만 열심히?

"신부님,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기도 열심히 하면 되나요?" 만일에 이제 막 성당에 나온 예비자나 초등학생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하도록 하렴." 하지만 어느정도 신앙생활에 몸 담은 사람이 묻는다면 저는 다시 몇가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기도를 해 오셨고 지금 열심히 한다는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이마저도 질문의 수를 적게 물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잘 하려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인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순박하게 답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그런 것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의외로 복잡하고 그 내면이 순진하지만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정말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그 영적 여정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이들은 모두 순진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능구렁이 같은 이들도 있고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은 기쁘게 받아들여 주셨지만 그 의도가 불순한 이들에게는 위엄과 지혜로 대응하셨습니다. 사제에게 다가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한다고 소문난 이들 중에는 정말 내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지만 그런 이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고 나머지는 다양한 욕구를 지니고 다가오는 이들입니다. 악한 이들도 예수님에게 칭송을 던지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마태 22,16) 이 말은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는 제자가 한 말이 아니라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 아닌지를 질문하기 직전에 예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이 건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외형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은 썩어 있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외적...

신앙은 부수적 요소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기에 흥미로운 요소가 하나 있다. 먼저 과학의 발달을 살펴보자. 지금 우리는 전기 자동차 시대의 부흥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기술이 없다고 해서 인간이 '이동'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자동차 자체가 없던 시절도 있었고 바퀴가 생기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동'했다. 제 나름의 방식을 찾아서 이동해 온 것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편의와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이 부가적으로 더해져 왔을 뿐, 인간의 '이동' 자체는 변화가 없었다. 이제 '문화'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는 수많은 문화적 부흥기를 겪어왔다. 인간의 권리를 보다 더 확충해 왔고 모든 이가 평등한 시대로 나아가는 것 같다. 지금의 단계도 역시 '완성'된 것은 아니기에 앞으로는 또 어떤 변화를 겪을지 모른다. 과거에는 노예가 존재했고, 여성의 신분이 극적으로 달랐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그런 경향은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제도가 개선되지 않은 시대에도 복음이 존재했고 인간의 구원은 작동하고 있었다. 마치 자동차가 없어도 '이동'이 가능했던 것처럼, 문화적 개선 이전에도 '구원'은 여전히 열려 있던 주제였다. 인간의 발전을 멈추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현재의 불편을 반영해서 더 나은 쪽으로 끊임없이 바뀌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의 근저에 인간의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영역에 구원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요소가 바뀌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신앙에 신경쓸 수 없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기 자동차가 없으니 나는 움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핑계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 가운데 사람들이 핑계를 대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콱 막혀서 내가 하느님께 가고 싶어...

혼란의 교회에 올바른 질서를 주시는 분 - 성령

예수님의 주변에는 온갖 인물들이 들끓고 있었다. 일단 예수님이 당신의 기적들로 군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킴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메세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변화된 모습으로 산 것은 아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그러지 못했다. 제자들은 여전히 높낮이 다툼에 몸담기도 했고(누구에게 더 힘이 있는지를 다투는 권력 질서 중심의 보수성향), 또 그분이 로마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언제 뒤집을지 궁금해 하기도 했으며(상황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현실을 바꾸어 보려는 진보성향), 거룩한 변모를 보고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지상에 붙들어 두려는 시도도 있었고, 막연한 시기와 질투로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기도 하셨다.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신앙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기가 달라지고 역사가 흐르면서 '껍데기'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동일한 주제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다. 한쪽은 지키려고 하고 한쪽은 뒤집어 엎으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의 진정한 메세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의도하신 것인가? '하느님의 뜻' 말고는 다른 적절한 답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뜻은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에게 열어보이는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로 완전히 파악해 낼 수는 없는 무엇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설정해 두고 살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도 우리는 모든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도 한정된 시간 안에 묶여 있을 뿐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후대의 자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채 지금의 것들을 잔뜩 소비해 버리고 심지어는 자녀 세대에게 그 결과가 가기도 전...

21세기 무엇을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 것인가?

우리들은 마구 소비하며 살아왔다. 더 많이 구입하고 더 많이 사용하고 더 많이 체험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상의 소중함과 이미 갖추고 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상실해 갔다. 언제나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했고 더 새로운 물건에 열광했다. 2020년, 코로나가 왔다. 코로나는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가장 극단적으로 마스크가 일상화 되었고 늘 마시던 공기를 힘들게 들이쉬게 되었다. 편안히 걷던 산책길이 불편하게 되었다. 일상의 모든 영역을 재검토하게 되었고 항상 '감염의 위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인류는 공통된 진통을 겪기 시작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전에 더욱 자유로웠던 이들일수록 더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우울증'이라는 정신적 질병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2021년, 코로나는 장기화 되어 가고 있고 우리는 이제 코로나와 함께 하는 일상에 어느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사회의 많은 영역이 리셋되고 있는 중이다. 교회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활발하게 진행해 오던 많은 행사, 일들이 멈춰지고 '이 시국에 이게 정말 필요한 일인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영역이 남게 된다. 사회의 각 영역도 비슷하다. 무엇이 가장 필요한 일일까? 그것은 코로나가 아무리 심해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다. 무엇이 거품이었을까? 코로나를 앞에 두고 멈출 수 있는 일이면 거품이다. 코로나가 와도 밥은 먹어야 하지만 지나친 관광을 가는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일은 해야 하지만 굳이 회의실에 모여서 공연히 시간을 보낼 이유는 없다. 생존에 필수적인 일들이 있고 부가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여전히 이 구분점이 혼란스럽다. 그래서 유흥시설이 여전히 활성화된 가운데 코로나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퍼져나간다.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소비와 잡다한 활동이 멈춰진 이곳...

살아있는 말씀 - 성경

"아차차이루는 노란색이다."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말을 외웠다고 한다면 그는 이 말을 '이해'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순한 암기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 뜻은 여전히 가리워져 있습니다. '노란색'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알고 문장 안에 있는 무언가가 노란색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아차차이루'가 도대체 뭔지 알 도리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공부도 비슷합니다. 누군가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구절을 반복해 적고 외우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그 성경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가 그에게 온전히 흡수된 것일까요? 그렇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는 성경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올바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정보를 담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도'하는 바가 있고 우리가 그것에 가 닿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물론 성경을 가까이 두고 열심히 읽고 가능하다면 써보기도 하면 좋겠지만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성경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충분히 실천하고 사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이 의도하는 바를 충실히 살고 있다면 설령 성경의 세부적인 내용을 모른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 성경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라면 주님의 계명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고 모든 율법서가 의도하는 것을 잘 이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의 몇 항 몇 절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서 율법의 근본 정신을 침해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 정작 율법의 본질적 가르침은 거부하고 있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

단순하고 순진한 신앙의 아름다움

잠자리를 보고는 그 나는 모습에 경탄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우리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그 아이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있지요. 그래서 더는 경탄하지 않으며 대수롭지 않게 봅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곤충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과학자'는 잠자리를 한마리 잡아서 온통 뜯어놓고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박제를 해서 자신의 연구를 완료했다고 우쭐대겠지만 정작 아이가 바라보던 그 생명력 가득한 잠자리를 상실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고 그 신비는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고 참여하는 만큼 드러나고 밝혀지기도 합니다. 물론 절대로 그 깊은 신비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어린 아이의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에서 경탄하게 되는 신비의 아름다움도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닙니다.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는 그 신비를 열심히 연구해서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보다도 순진한 아이의 시선에서 더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경탄하기를 그쳐버린 신앙, 이미 성당 문턱을 닳도록 다녔다고 해서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버리는 상태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미온적 태도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스스로의 이기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신앙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의 각종 제도와 구체적인 인물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래 보물의 빛 자체를 상실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보석은 여전히 보석이라서 먼지만 좀 털어내고 나면 다시 예전의 그 찬란함을 빛내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그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당에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느끼던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 속에는 여전히 우리가 찾아내고 얻어내야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