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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 아직도 갈라져 있는 우리




솔직히 들은 이야기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그저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가 누리는 유산을 상속받은 셈인 나로서는 이 사회의 주된 사조를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하나 거부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곳에서 가르쳐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북한의 소위 나쁜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순진했다. 고만고만한 삶의 수준에 만족하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저 가족이나 부양하고 입에 먹을 것 떨어지지 않는 정도면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소위 위에 앉아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상, 저런 사상이 중요하고 상대의 사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기꺼이 전쟁을 시작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싸우는 이들은 정작 그런 사상들이 뭔지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나 역시도 그냥 그 나이 되면 군대에 가야 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알고 있었고 군대에 갔을 뿐이다. 군대에 갔으니 가르쳐주는 군대의 기술을 열심히 익혔을 뿐이고 복무 기간을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왔을 뿐이다. 휴전이라는 교착 상태는 이런 식으로 군대를 다녀오는 이들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요소다. 우리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에 대한 기억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더 흐릿해져 갈 것이다. 물론 역사책 안에 남아 꾸준히 가르쳐지겠지만 세대가 거듭할수록 전쟁의 참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미 지금의 어르신 세대부터 일제시대의 참혹한 역사를 직접 체험한 분들은 서서히 세상을 떠나가고 없다. 누가 고구려 시대의 위기감을 기억하겠는가? 역사란 그런 것이다. 흘러가면 서서히 감각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전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새로운 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무언가를 직접 겪지 않는 다음에는 그 위기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내가 바라보는 남북한은 그 두 곳 모두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저 곳에도 지금의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적 기본 욕구를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헌데 북한에서는 '도망'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도망' 가는 사람은 없다. 그것으로 저곳의 현실이 드러나는 셈이다.


모든 정보망이 차단되고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는 나라. 밤의 위성 사진에 평양과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불빛도 없는 나라. 그리고 최근들어 도망 나온 이들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황들이 전해지면서 저 나라의 현실이 어렴풋하게나마 감지가 된다.


여전히 위에 있는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해결책을 강구할 의지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바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방법은 없는 것인가?


사람은 언제 움직일까? 가장 쉽게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은 그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하루종일 일을 안해도 삼시세끼 밥은 챙겨 먹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가 고파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챙긴다. 찜찜하면 목욕도 하고 추우면 옷도 사입는다. 그렇게 기본적인 욕구가 해소되고 나면 그 다음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마음이다. 공감하고 감동하고 동정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은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연예인도 쫓아다니고 팬레터도 쓰고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거룩한 뜻을 품을 때에 자신의 본성에 반해서라도 무언가를 하게 된다. 참된 신앙인들이 그들이다.


우리는 이런 방향을 기초로 움직일 수 있다. 먼저 신앙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 안에 북한의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항구하게 기도안에 포함할 줄 알아야 한다. 강아지도 아프면 불쌍해하는 현실이다. 우리는 북한에서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를 억압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북한의 현실에 대한 공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실 모르는 이들이 많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가 산더미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에는 항상 우선순위가 있다. 북한의 현실 안에서 그들의 인권과 생사의 문제는 우리가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보다는 분명히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틀림없다. 아프리카에 몇만원 보내면서 대리만족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현실에 조금은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오늘날에는 그것을 위한 수단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다. 북한은 과연 어떤 현실을 지니고 있는지 오늘 만이라도 자료를 조금 찾아보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이런 우리의 뜻이 모이고 공론화 될 때에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 가장 기초적인 본능의 욕구, 즉 자신의 생존 욕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북한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기 시작할 때에 이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할 것이다.


60년이 흘렀다. 그 어떤 전쟁도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 눈감고 모른체 해서도 안된다. 참된 평화가 이 한반도에 자리잡기를 기원한다. 이건 '정치'적인 문제와 엮어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건 우리 신앙의 문제이고 양심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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