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기도 열심히 하면 되나요?"
만일에 이제 막 성당에 나온 예비자나 초등학생이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하도록 하렴."
하지만 어느정도 신앙생활에 몸 담은 사람이 묻는다면 저는 다시 몇가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어떤 기도를 해 오셨고 지금 열심히 한다는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이마저도 질문의 수를 적게 물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잘 하려는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인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순박하게 답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그런 것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의외로 복잡하고 그 내면이 순진하지만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정말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그 영적 여정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이들은 모두 순진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에는 능구렁이 같은 이들도 있고 예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은 기쁘게 받아들여 주셨지만 그 의도가 불순한 이들에게는 위엄과 지혜로 대응하셨습니다.
사제에게 다가오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열심히 한다고 소문난 이들 중에는 정말 내면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지만 그런 이들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고 나머지는 다양한 욕구를 지니고 다가오는 이들입니다.
악한 이들도 예수님에게 칭송을 던지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마태 22,16) 이 말은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는 제자가 한 말이 아니라 황제에게 세금을 내도 되는지 아닌지를 질문하기 직전에 예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이 건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외형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속은 썩어 있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외적인 척도로 가늠되기가 힘든 영역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신앙의 방식은 외적인 특정 행위로 표현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일에 미사에 가고, 고해성사를 자주 보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활동은 껍데기로만 이루어지는 행동이 아니라 그 내면의 의도와 진실한 신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내면의 요소들을 모두 무시하고 외적인 행동에만 열중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의도를 품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셈입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4,40-42)
아무리 같은 행동에 몸담고 있다고 해도 동일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고 같은 미사에 나와 앉아 있다고 해서 하늘 나라에 모두 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 깨어 있는 삶을 영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저 외적으로 짐짓 거룩해 보이는 일에 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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